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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시골 농군이었던 내 할아버지는 “동네 창피하다” “남부끄럽다”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셨다. 이웃의 시선을 다분히 의식한 행동거지에 관한 말씀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이 말씀을 캐나다 신문을 보면서 종종 떠올린다. 이곳 경찰과 언론은 흉악한 범죄를 적발하기만 하면 피의자 신상을 바로 공개한다. 법으로 처벌하기에 앞서, 일단 남부끄럽게 하고 동네 창피부터 톡톡히 당하게 한다. 특히 악질 흉악범이나 부정부패 공직자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다. 최근에는 두 여성과의 성관계 동영상을 동의 없이 인터넷에 유포한 남성 티안 추(24), 행인을 치어 숨지게 하고 달아난 뺑소니 여성 운전자 에런 화이트(28) 체포에 관한 기사가 나왔다. 얼굴 사진은 기사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이다.

사회 정서적으로 흉악범들을 단죄하는 것이 신상을 공개하는 첫 번째 목적이라면, 두 번째는 범죄 예방 차원. 크든 작든 공동체 질서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르면, 망신살 뻗친다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몇 년 전 몰래 빼돌린 고객 복권으로 초대형 ‘로또를 맞은’ 편의점 주인이 적발된 적이 있다. 당시 신문 방송은 사건 당사자는 물론 당첨금을 수령해간 20대 딸의 이름과 얼굴도 공개했었다. 사건은 재산 압류와 벌금형 정도로 마무리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자기가 속한 커뮤니티에서 한동안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게 하는 가혹한 정서적 징벌이 가해졌다.

물론 이 같은 신상 공개에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10여년 전 어느 한인교회 목사가, 어학연수생 여러 명을 성폭행 혐의로 고발해 대서특필된 적이 있다. 경찰과 언론은 관행대로 한국 남학생들의 이름·나이·얼굴을 시원하게 밝혔으나, 나중에는 목사를 무고죄로 입건하면서 그 죄상과 신상을 더 시원하게 공개해야 했다. 이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경찰과 언론은 피의자 공개를 주저하지 않는다. 공개를 통해 얻는 효과가, 그 부작용에 비할 바 없이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동네 창피”하게 만드는 캐나다 처벌 문화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몰라도, 요즘 한국 매체를 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마스크 씌우고 A씨·B씨 하며 악질 흉악범을 가려주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죄 추정 원칙이 지켜지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다. 문제는 이 원칙 때문에 흉악범에 대한 사회 정서적 처벌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들은 뭇사람의 손가락질을 피할 뿐만 아니라 얼굴을 못 들고 다닐 일도 없다. 인터넷에서 신상 털기가 벌어질는지는 몰라도, 사건이 불거질 당시 공식적으로 동네 창피 당할 일은 없다. 캐나다와 비교하자면 한국 흉악범들은 정서적 처벌의 면죄부를 일단 갖게 되는 셈이다.

얼마 전 한국 정부는 디지털 성 범죄자 처벌 수위를 높이겠다고 천명했다. 그 발표문에서도 범죄자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겠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보복 동영상 유포로 인해 피해자가 생겨나고, 그들은 바로 ‘사생활 공개’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개인의 사생활을 보복이랍시고 공개한 당사자들은, 입건이 되면서도 사생활은커녕 이름과 얼굴조차 공개되지 않는다. 감옥에서 보낸 한 철보다 대중 앞에 신상을 드러내는 한순간이 더 큰 형벌이 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사생활이 인터넷에 공개되는 바람에 사람이 목숨까지 끊는 마당에, 그것을 악용해 떼돈을 벌어들인 음란 사이트 운영자들은 A씨와 B씨로 숨겨주는 것, 법대로 하겠다며 이 같은 부조리를 그대로 두는 것. 이런 것이야말로 동네 창피한 일이 아닌가 싶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경향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성우제 | 재캐나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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