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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방태산에 가면 처음 갔을 때 들었던 말이 늘 머리에 떠오른다. 방태산의 지형은 마치 솥 같아서 움푹 꺼진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 솥의 테두리 같은 능선을 걸어 원점회귀하면 됩니다. 내가 ‘솥산’이라는 뜻의 부산(釜山) 출신이라는 것과 뭐 상관있으랴만 솥이라는 단어에는 묘한 환기력이 있다. 오늘은 그 방태산을 세번째 오르는 길. 숭늉으로 말갛게 씻긴 솥단지의 한 사면을 기어오르듯 녹음이 울울하게 흘러넘치는 골짜기를 훑어오를 때 문득 시 한 구절을 소환해본다. “… 돌아가 밥을 한솥 해놓고 솥을 허벅지에 끼고 먹고 싶다 마치 꿈처럼/ 잠드는 것처럼/ 죽는다는 것처럼”(허수경) 독일에서 외롭게 고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시인에게까지 생각이 미칠 무렵 한 익숙한 광경을 만났다. 발바닥을 폭신하게 만들어주고 두리번거리는 눈길을 편하게 받아주는 전방의 풍경. 그건 바위도 아니고 모래도 아닌 무른 암석들이 만들어주는 길이 아닌가. 그 길은 맞춤하게 좁고, 좁아서 잘록하고, 그래서 휘어져 그 어디론가 가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그러기에 이런 길은 혼자 가는 게 좋다. 일행에서 뒤떨어져 마음껏 자빠져서 손바닥만 한 꽃사진을 찍었다.
모래도 아니고 바위도 아닌 저 무른 암석을 내 고향에서는 ‘썩박돌’이라 했다. 돌 같기는 했지만 손으로 짚으면 부스스 흘러내리기도 하는 푸석푸석한 알갱이들. 얼핏 박수근 그림의 바탕이 되는 암석 같은 질감이 바로 이 돌 아닌 돌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만큼 정다운 썩박돌들. 때마침 알맞게 정금나무가 있고 산앵도나무도 있다. 어린 시절 소먹이 하러 갔을 때 참 익숙하고 친하게 맞닥뜨린 나무들이다. 신맛의 열매는 이름만 떠올려도 침이 흥건해진다.
나를 자빠뜨리며 여러 생각을 발굴하게 만든 건 단풍취였다. 산나물로 많이 먹는 취 종류 중에서 단풍잎을 닮아 그런 이름을 가졌다. 이제 그런 이름을 가졌기에 더욱 아름다운 단풍취. 매미소리는 곧 끊기겠지만 내년에도 봄은 온다. 풋향기 오를 때 허벅지에 솥단지 끼고 단풍취 한 장 뜯어서 쌈싸먹어 볼까. 입에서 단풍, 단풍이라는 소리가 나더라고 공갈이라도 쳐볼까. 단풍취,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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