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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가면 이상하게 받침 없는 지명에 마음이 끌린다. 그중에서도 서귀포는 특히 그렇다. 받침이 하나도 없는 곳, 서귀포. 그 어디로 돌아가기 직전 모든 흔적을 지우며 잠시 머무는 장소일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희한한 나무를 보자고 찾아간 서귀포 근처 어느 포구의 한적한 골목 식당. 손바닥 선인장만 한 정원과 주황색 양철지붕이 잘 어울렸다. 이 집의 맛과 향을 보증하겠다는 포즈로 서 있는 배롱나무는 아직도 꽃등이 무성하다. 식당을 닮은 길가의 메뉴판에는 그 이름만으로 혀를 씰룩거리게 하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다. 간장덮밥, 성게문어덮밥, 오징어덮밥, 딱새우덮밥, 보말칼국수, 파전. 한편, 배롱나무 아래 임시 입간판에는 또 이렇게 적혀 있다. 준비한 재료가 소진되어 오후 5시에 다시 시작합니다. 아마도 그 재료의 8할은 식물들일 것이다.
꽃에 입문하고 꽃에 흠뻑 빠지면서 동물과 식물의 관계를 살펴보는 내 생각이 조금 변했다. 나무를 앞에 두고 움직일 줄도 모르는 저 등신들 좀 보라며 키득거렸던 게 그간의 상투적인 사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식물이 동물을 먹여 살린다는 생각, 굳이 우열을 다툰다면 누가 더 고등하겠느냐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식물이 자생한다면 동물은 기생한다는 게 엄연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재주 많은 천하의 요리사가 운영하는 식당일지라도 재료가 떨어지면 문을 닫아야 하는 것처럼 음식이 외부에서 공급되지 않으면 몸은 폐허가 된다. 우리는 외부에 멱살이 잡힌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보려고 한 희한한 나무는 참식나무에 기생하는 참나무겨우살이였다. 식당 앞 현무암 돌울타리에 자라는 우람한 참식나무의 가지에 뿌리를 내린 그 나무는 때맞추어 꽃을 제대로 피우고 있다. 기생하는 제 처지를 고려하여 참식나무가 열매 키우기를 기다렸다가 이제야 늦게 꽃을 피우는가 보다.
겨우살이의 이름이 왜 겨우살이인 줄이야 모르겠다. 동서남북에서 왜 하필 그쪽에만 받침이 없을까. 해가 돌아가는 서쪽을 향하여 서서 서귀포의 참나무겨우살이를 한참 바라보았다. 참나무겨우살이, 겨우살이과의 상록 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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