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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 박명이다. 여기는 백두산의 서파로 오르는 산중 휴게소이다. 하룻밤일지언정 운 좋게 백두산의 주인이 되었다. 별들도 계단처럼 쌓여 있었던 모양이다. 밝기에 따라 하나둘 사라지고 있는 중. 마침내 1442개의 계단을 올랐다. 늘 만나는 해이지만 제대로 똑바로 쳐다본 적이 없는 태양이 멀리 자암봉과 쌍무지개봉 사이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움푹 꺼진 천지로 내리닫는 급한 경사에 핀 바위구절초. 가장 먼저 오늘의 햇살에 얼굴을 씻는 생명이다. 해가 뜨면서 세상은 밝아졌다지만 그만큼 세상은 엎질러진 물처럼 돌이킬 수 없는 사태다. 어둠이 깨진 상태가 지나고 한낮이면 지독한 땡볕에 시달려야 한다. 지금은 온순하기 짝이 없는 햇살이 금세 털이 빳빳한 짐승처럼 돌변해서 세상을 찔러댈 것이다. 대피소에서 컵라면으로 아침을 간단히 때우고 텅 빈 광장에서 햇빛을 쬐었다. 이 무량한 자원은 장엄한 백두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에 자꾸 손이 오므라졌다. 그냥 흘러 보내기가 아까웠던 것이다. 나의 손은 구부러지기가 쉬웠으니 포클레인처럼 햇빛을 어디에서고 움푹 퍼 담는 버릇 하나를 백두산에서 얻었다!

이상은 지난여름 백두산에 올라 일출을 보고 적은 소감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50일 후, 나의 시선이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머문 곳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어느 분은 손으로 천지물을 떠서 입안으로 들여놓기도 하였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 물맛을 보기 위해 아니 그러고는 못 배겼으리라. 우리가 눈으로 본다는 건 앞만 보고, 겉만 보고, 부분만을 본다는 점에서 반쪽짜리 행위일 수밖에 없다. 내가 그때 영접한 천지일출이 개인적으로 감격스러운 일이긴 해도 이런 본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맞잡은 손은 다를 수 있다. 부디 역사를 통찰하는 혜안으로 두루 원만한 결과를 맺으시기를! 맞잡고 치켜든 두 정상의 손 뒤 어디쯤은 내가 정성스럽게 바라본, 지금도 눈에 밟히는 바위구절초가 있던 자리이다. 장군봉에는 무슨 꽃이 피어 있을까. 천지의 첫 햇살에 얼굴을 씻으며 웃던 백두산 바위구절초의 근황이 몹시 궁금해졌다. 바위구절초,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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