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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당신의 편지

opinionX 2019. 11. 21. 10:44

아버지와 나는 여느 부자지간처럼 소가 닭을 보듯 닭이 소를 보듯 하며 오랜 세월 서로를 견뎌왔다. 어떤 점에서는 현명한 처사였다고도 할 수 있었다. 대놓고 으르렁거렸다면 서로에게 상처만 줬을 테니까. 그런 이유로 우리 부자는 보고도 못 본 체하거나 에둘러서 말하는 방식에 익숙해졌다. 이처럼 말이 통하지 않아 아예 말을 별로 나누지 않는 사이였음에도 기억에 남는 아버지와의 일화는 너무 많아서 아버지를 생각하면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다. 

내가 중학생이던 어느 주말이었다. 그날쯤 편지가 도착하리라 여긴 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쉬지 않고 달려서 집으로 돌아갔다. 오전에 이미 우체부 아저씨가 다녀갔을 테니 기다리던 편지가 도착했을 거였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가 아니던가. 고운 필체로 다정한 이야기가 담겼을 여학생의 편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간지러워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마루에 놓인 편지봉투가 와락 눈에 들어왔다. 나만 보면 심드렁하게 되새김질을 해서 밉상이던 외양간의 소들조차 그때만큼은 사랑스러웠다. 

나는 한달음에 토방 위로 뛰어 올라가 마루에 가방을 던져놓고 편지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봉투에 쓰인 삐뚤삐뚤하다 못해 난폭해 보이기까지 한 글자를 오래도록 노려보았다. 집에서 굴러다니는 굵직한 사인펜으로 쓴 게 분명한 그 글자들을 말이다. “홍기, 보아라. 우리는 외출허니 소 밥은 니가 주거라.”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맞춤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어서, 내 이름마저 틀리게 써서, 꼼짝 말고 집이나 지키라는 명령이어서가 아니었다. 뜯어보지도 못한 예쁜 봉투에 쓰인 아버지의 악필에 내 순정은 물론 편지를 보낸 그이의 순정마저 짓밟힌 듯해서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를 미워했는데 그때부터 나는 정말로 아버지를 미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군대에 갈 때였다. 입영 영장을 받아놓고 대여섯 달쯤을 고향 집에서 지냈다. 아버지와 나 모두에게 영락없이 불편한 몇 달이었다. 다른 집 자식들처럼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도 아니지, 일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으니 농사일에 써먹을 수도 없지, 게다가 별 쓸모도 없는 글 나부랭이나 쓰겠다며 집에 죽치고 들어앉았으니 아버지의 심기가 어떠할지 뻔히 보였다. 입영 날짜를 앞당길 수만 있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윽고 그날이 다가왔다. 너무 먼 길이어서 하루 전날 집을 나서야 했고 나 혼자 떠나야 했다. 대문에서 큰절 한 번 올리면 당분간 아버지와는 볼 일이 없게 된 거였다. 어머니는 눈시울을 적셨지만 아버지는 담담했다. 아버지가 내게 봉투를 건넸다. 여비는 어머니가 이미 줬던 터라 나는 아버지가 따로 챙겨주는 돈 봉투이겠거니 하며 주머니에 넣고 집을 떠났다. 

기차에서 봉투를 꺼내 보았다. 딸려 나온 건 편지지였다. 눈에 익은 아버지의 필체. 굵은 사인펜으로 휘갈겨 쓴 편지였는데 내가 당신에게 받은 첫 편지였고 이후에도 다시 받아본 적 없는 유일한 편지였다. 아마 다른 때였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여전히 정서법에 어긋나는 악필인 데다 내용도 진부했다. 상관의 명령에 충실하고 나라에 보탬이 되는 군인이 되어라, 솔선수범해라, 전우애를 발휘해라 등등.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은 이런 거였다. 니 어머니는 아프지 말라고만 헌다. 나는 편지지를 봉투에 넣고 차창 밖의 뭉개진 풍경을 보았다. 그러니까 이 짧은 편지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든 이력이 담겨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이 다인 아버지는 문장이 형편없었고 초등학교 중퇴인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어머니도 쉬운 글자는 더듬더듬 읽었으나 쓸 수는 없었다. 어머니가 내게 당부하고 싶었던 말을 아버지가 편지 끝에 덧붙여 써야만 했던 이유다. 말이 안 통해 아예 말을 별로 나누지 않는 사람 사이에도 기억에 남는 사연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지금은 안다. 그이들은 거의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거의 모든 걸 말해왔으니까.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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