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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웠다. 돌아보건대, 생은 늘 외로웠다”로 시작하는 한 편의 글을 읽었다. 외롭다는 말에 무심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첫 문장부터 돌부리에 걸린 듯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생을 돌아보아야 할 만큼 나이를 먹은 건 아니라고 여기지만 생을 돌아보기에 좋은 나이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닐 테니 이런 문장 앞에서는 잠시 숨을 고르며 머물러도 괜찮을 듯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내가 쓴 최초의 시도 외로움에 대한 것이었다.

그 시를 쓴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 부임한 지 몇 해 안되었지만 인기가 많은 분이어서 다른 반 동급생들의 부러움을 샀다. 첫인상은 좀 무시무시했다.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분이어서 까다로운 성격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었으니까. 6학년이 되기 전부터 동네 형들과 누나들에게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던 터라 잔뜩 긴장한 탓도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반 친구들은 다들 그런 듯했다. 그렇지만 며칠 안되어 왜 인기가 많은 선생님인지를 알게 되었다. 당신은 어린 학생들이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집이 가난하다고 해서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차별하지도 않았다. 그런 차별이 흔하다 못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선생님은 수업 운영 방식에서도 남달랐다. 일주일에 세 시간인 작문 시간을 다른 반 선생님들은 보통 자습 시간 삼아 적당한 요일로 한 시간씩 떨어뜨려 놓았지만 우리 반은 달랐다. 오전 수업만 있던 토요일은 오롯이 작문 시간으로 채워졌다. 우리 반 친구들은 매주 토요일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교에 갔고 책을 읽거나 시를 쓰거나 좋은 시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선생님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일 년을 보냈다. 날이 갈수록 그 시간을 즐기게 됐고 돌아보니 아마도 그때 나는 외로웠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도 외로울 수 있는 법이다. 세 해 전에는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바로 전해에는 아버지가 탈곡기에 손가락 하나를 잃었다. 나는 형제자매가 많은 친구들이 부러웠다. 집에 돌아가면 아무도 없었다. 적막과 고요만이 나의 형제였다. 그 시간을 늦추기 위해 학교에 오래 머무는 날이 많아졌다. 내가 홀로 찾아들어 시간을 보내던 곳은 도서관이었다. 거기에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을 만큼 쓸쓸한 곳이었다. 그 사실이 퍽 마음에 들었다. 서가 사이 마룻바닥에 앉아 책장을 넘기면 창으로 스며든 햇살이 재단한 허공에서 속삭임처럼 책 먼지가 들끓었다. 외로움은 그처럼 숨죽인 채 내 곁에 머물렀다. 그러던 내가 처음으로 시를 쓰게 된 거였다. 도서관에서만 위안을 찾을 수 있던 한 아이가 꾸미지 않아도 괜찮다고 어른의 말투를 흉내 내지 않아도 좋다고 무엇을 느끼든 내가 느낀 걸 쓰면 그게 바로 시라는 선생님의 격려를 받으며 시를 끄적이게 된 거였다. 

그렇게 한 해를 보낸 우리는 각자 두 편의 시를 제출했고 선생님은 그 시들로 문집을 엮어 졸업하던 날에 한 권씩 나눠주었다. 나는 지금도 고향집에 가면 ‘미리내’라는 제목의 이 문집을 가끔 들여다본다. 그 시절에 내가 느껴야 했던 외로움을, 사실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한 번도 발설하지 못했던 감정이 서투르지만 결백한 언어들로 행을 이루어 잠에서 깨어나는 걸 본다. 문집에 실린 다른 친구들의 시에서도 내가 느꼈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감정들을 본다. 어쩌면 그 아이들의 가슴속에서 난생처음 이끌려 나와 부신 눈을 깜박이고 있을 그것들을. 그로부터 삼십여년이 지난 지금 그해 일 년 동안 우리에게 시를 가르쳐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문학을 알게 해준 당신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외로워하던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외로웠다. 돌아보건대, 생은 늘 외로웠다”(최명표)로 시작하는 당신의 글을 읽었다. “그날 처음으로 눈곱이 산 자가 저승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몌별하느라 밤새 빚어낸 사리인 줄 깨달았다”라는 문장처럼 당신 역시 외롭고 높고 쓸쓸했음을 알았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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