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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목요일 땅끝마을 해남의 아름다운 사찰 미황사에 다녀왔다. 조계종에서 기획한 출가학교가 열렸기 때문이다. 41명의 20대 남녀가 8박9일 동안 출가학교에 모여들었고, 나도 강사로 초청된 것이다. 도대체 무슨 번뇌와 상처가 그리 심해서 이 아름다운 사람들은 여기에 모여 있을까. 오전 강의가 끝나고 점심 공양을 마친 뒤, 추적추적 떨어지는 비를 피한 처마 밑에서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달마산이 보였다. 아까 강의를 들었던 몇몇 임시 행자 아가씨들이 반갑게 내게 말을 붙여왔다. 어쩐 일로 출가학교에 들어왔는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상처를 보여줄 때까지 절대로 보여 달라고 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처마 밑에서 그녀들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출가학교에 들어오자마자 스님들이 스마트폰과 돈을 거둬갔다는 것이다.


얼마 전 조사에 따르면 어른들이 하루 평균 4시간 스마트폰을 한다면, 청소년들은 7.3시간 스마트폰을 사용한다고 한다. 우리 젊은이들이 얼마나 스마트폰에 중독돼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스마트폰을 매몰차게 스님들은 거둬 가버린 것이다. 돈이라면 상관은 없다. 어차피 달마산 기슭 깊은 산골에서 무슨 돈 쓸 일이 있겠는가. 하루이틀 무엇인가 빼앗겨버린 것과 같은 엄청난 금단현상이 있었다고 그녀들은 재잘거렸다. 그렇지만 내가 도착한 목요일에 그녀들은 이미 스마트폰이 없다는 것에 적응된 상태였다. 하긴 그러니 스마트폰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 내게 들려주었는지 모를 일이다. 스마트폰에 시선과 정신을 빼앗긴 7.3시간을 회복한 뒤 그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엇인가를 보지 않는다면, 다른 것을 보기 마련이다.



그녀들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달마산을 보았고, 하늘의 구름을 보았으며, 산사를 둘러싼 아름다운 나무들의 움직임에 바람을 보았으며, 아름다운 미황사 경내의 당간지주를 보았을 것이다. 또한 그녀들은 사람들을 보았을 것이다. 출가학교 교장선생님이신 법인 스님, 미황사의 주지이신 금강 스님, 그리고 맛난 사찰 음식을 마련하시는 공양간 사람들. 그 모든 사찰 식구들의 자애로운 얼굴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마 자신처럼 출가학교에 들어온 동료들의 얼굴이 보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순간 그녀들은 대화를 시작하리라는 점이다. 그렇다. 잠수함에 홀로 타서 계기판을 응시하는 것처럼 스마트폰에 빠져 그녀들이 잊고 있었던 것은 바로 대화였던 것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 “출가학교에 모여든 20대 남녀

스님에게 스마트폰을 앗긴 다음에야

산·바람·구름을 보기 시작했다

더 중요한 건 대화가 시작됐다는 거다”


스마트폰은 과거 TV가 했던 역할을 고스란히 하고 있다. 화목한 가정의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식사를 끝낸 가족은 응접실에 모여서 TV 모니터를 보며 웃음을 터트린다. 아마 재미있는 연예프로그램이라도 보고 있나보다. 그렇지만 이 순간 불의의 사고로 TV가 고장나면, 모든 상황은 극적으로 변해버린다. 서로가 너무나 낯설게 다가오고, 고장난 TV 앞에 있는 것이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다. 아버지는 베란다로 담배를 피우러 가고, 어머니는 빨래하는 것을 잊었다고 화장실에 들어가고, 동생은 갑자기 책을 본다며 자기 방으로 종종걸음을 치고, 누나는 전화할 데가 있다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릴 수도 있다. 이렇게 TV는 가족을 모여 있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지금까지 가족을 분열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순간 현명한 사람이라면 TV가 지금까지 가족이 서로 대면하는 시간을 얼마나 빼앗았는지 깨닫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가족을 다시 거실에 모이게 하려고 TV를 고칠 것이다.


대중매체란 항상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서 대화의 가능성을 빼앗는다. 이것은 사실 매체, 즉 미디어(media)의 본질 아닌가. 매개(mediation)란 말이 있다. 그것은 벽돌과 벽돌을 붙이는 시멘트와 같다. 얼핏 보면 벽돌과 벽돌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벽돌과 벽돌이 직접 만나는 것을 막는 역할도 한다.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 매개라는 말이 그렇듯이 모든 매체는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교묘하게 사람들을 분리시키고 고립시키고 있다. 영민한 현대 프랑스 사회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도 자신의 저서 <리듬분석>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미디어화는 대화를 지우는 경향이 있다”고 말이다. 영화라는 매체를 생각해보아도 분명하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극장에 들어가 있으며 동시에 희로애락을 표현한다고 해도, 극장 안에서 누구나 고독한 개인으로 머물러 있지 않은가.


(경향DB)


함께 있지만 고독하도록 만드는 것, 공감이 이루어진다고 착각하지만 대화는 사라지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대중매체의 본질이다. 이런 대중매체가 드디어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TV는 걸어 다닐 수도 없고, 영화관이 우리에게 올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스마트폰은 마치 그림자처럼 우리의 손에 잡힌 채 영원히 우리가 살아 움직이는 한 함께할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것 같다. 친구와 만나 그 사람에게 집중하기보다 어느 사이엔가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다양한 볼거리와 시시각각 알려주는 정보들에 우리는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나마 TV나 영화는 외형적으로나마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제 친구와 직접 만나 대화하는 것보다 카카오톡 등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으로 화면상으로 대화하는 것이 더 편하게만 느껴지니까.


대화하던 친구는 어느 사이엔가 다른 일로 떠날 수 있지만, 스마트폰은 항상 내 손안에 있다. 친구보다 더 친구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이제 혼자서도 우리는 외롭지 않다. 스마트폰이 나와 함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타인을 그리워하는 고독의 시간마저도 스마트폰은 고맙게도 허락하지 않는 셈이다. 이제 어느 사이엔가 스마트폰은 우리의 제2의 심장이 된 것 같다. 스마트폰의 충전 게이지가 줄어들면, 우리의 심장도 그만큼 쪼그라든다. 밥을 잠시 굶더라도 우선 스마트폰부터 살려야만 한다. 스마트폰마저 나와 함께 숨쉬지 않는다면, 우리는 견딜 수 없는 고독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알까. 바로 그 스마트폰이 우리에게 대화를 빼앗으면서 고독을 선사했는데도, 고독을 완화시키고 있다는 착시효과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대화를, 그러니까 친구를 빼앗고 그 자리에 파렴치하게 들어앉았음에도, 자신만이 유일한 친구라고 우리를 속이는 것이 바로 스마트폰이다. 이렇게 우리 아이들을 자그마치 하루 7.3시간이나 병들게 만드는 스마트폰을 방치하는 것은 정당한 일일까. 미황사의 임시 행자들에게서 발견한 서로를 바라보는 해맑은 미소와 재잘거리는 대화 소리에서 우리는 작지만 커다란 지혜를 배워야 한다. 출가학교가 고독한 수행의 장소가 아니라 되찾은 대화의 장소가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아이러니한 일이다. 출가가 인간을 만나 대화하는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스마트폰을 없애면 그곳이 어느 곳이든 자연과 만나고 인간과 대화하는 제2의 미황사가 되는 것 아닐까. 출가학교를 운영하는 법인 스님이나 금강 스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다. 합장!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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