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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발전이 휘청거리고 있다. 그렇지만 제대로 휘청거린다기보다는 묘하게 휘청거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거듭되는 크고 작은 원전 사고로 전력 수급이 당장 위태롭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다른 한편으로는 원자력 발전의 핵심 부품이 부실 검사로 채택되었다는 더 위험천만한 이야기도 오가고 있다. 어느 경우이든 원전이 잘 돌아야 전력 수급이 차질이 없을 것이고 나아가 핵심 부품을 제대로 검사했다면 원전은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하는 논의일 뿐이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원전과 관련된 최근 쟁점들은 원전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휘청거리고 있다는 점에서 묘하다는 것이다. 제대로 휘청거린다면 이번 여러 일련의 사고로 원자력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되물어보는 계기도 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일본 후쿠시마시 대피소에서 아이가 방사성물질 측정을 받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다. (AP연합)


사실 원자력과 인간 사이의 문제는 자본과 인간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이 고효율의 원전을 욕망한 것이 아니라, 자본이 그것을 욕망했기 때문이다. 이윤 추구란 자본을 작동시키는 결코 종식시킬 수 없는 강박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윤 추구 과정에서 생기는 절망적인 부수 효과도 자본은 거침없이 이윤 추구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 산업자본의 메카인 공장은 인간에게 환경오염이라는 심각한 불이익을 가져다주었다. 그렇지만 산업자본은 자신의 무분별한 팽창을 반성하기는커녕 환경오염을 새로운 이윤의 창구로 활용할 정도로 기민하다. 깨끗한 물과 깨끗한 공기도 이제 훌륭한 상품으로 변했으니까 말이다. 깨끗한 물과 공기를 제조하느라 물과 공기가 더 오염되는 것도 자본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윤 추구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순간의 효율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의 생리상 원자력 발전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풍력 발전, 지력 발전, 태양 에너지 등등 대체 에너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효율이 문제인 셈이다. 자본주의는 이윤이 존재하는 곳을 찾아내는 본능적인 후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은 결코 대체 에너지에 얼굴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결국 원자력 발전의 경제성이 현저하게 떨어지지 않는 한, 자본은 집요하게 원전의 효율성에 자신의 몸을 맡기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그렇게도 쉽게 은폐되어 망각에 이르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당장 원전 사고 현장을 방문해보라. 원자력 발전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인간의 삶에 위험한 것인지 명백히 체험하게 될 것이다. 원전 사고는 과거에 일어났던 사고가 아니라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감할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 원자력 발전은 단순한 효율의 문제를 넘어서는 인간의 삶, 혹은 생존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니 잘못된 문제 설정에 속아서는 안 될 일이다. 원전이 낙후되어 자꾸 멈추어 전력 수급에 차질이 발생하는 것이 핵심 문제가 아니다. 나아가 원전에 부실한 핵심 부품이 사용되었다는 것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니 누구나 이런 표면적인 문제 이면에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원자력 발전은 항상 인간의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원자력 발전은 수력 발전이나 풍력 발전, 혹은 조력 발전과는 달리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질 때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한다. 한마디로 발전소라는 외관을 갖춘 원자 폭탄인 셈이다. 그러니 자꾸 원전이 작동을 멈추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 혹은 원전에 불량 부품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의 전신에는 한줄기 서늘함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 “‘효율’이라는 미명 아래 방치해오다

줄잇는 사고에 휘청거리는 원전

‘후쿠시마의 비극’ 망각한 건 아닌지

이제 후손들을 위해 답을 내려야 할 때”


이런 서늘한 한기는 원자력 발전이라는 근본적인 불안 요소를 우리의 삶에서 제거하지 않는다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선택할 때가 아닌가. 효율이라는 미명 아래 원전을 계속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뿐만 아니라 후손의 삶을 위해 원전을 점진적으로 폐기할 것인가?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정부가 주장하는 효율의 논리에 휘둘리고 있다. 어쩌면 전기 수급의 불안정 상황이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보다는 원자력 발전이 가져다주는 이득에 우리의 시선을 묶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당장 불볕더위에도 에어컨을 켜지 못하는 불편함, 혹은 결정적인 순간 단전이 되어 발생하는 생활의 불편함이 초래될 테니까 말이다. 바로 이 부분이다. 원자력 발전의 이득이 우리 눈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정부와 자본의 논리에 포획될 수밖에 없는 법이다.


원자력 발전이 표방하는 효율의 논리만큼 인간적인 가치에 적대적인 자본의 가치가 가장 노골적으로 관철되는 곳도 있을까. 순간의 이득에 연연할 때, 우리는 자본주의에 완전히 길들여져 원자력 발전을 긍정하게 될 것이다. 반면 우리와 후손들의 안정적인 삶을 걱정한다면, 그래도 우리에게는 아직도 희망은 남아 있다. 인간의 가치가 그래도 자본의 가치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자력 발전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가늠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거대한 시험석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삶의 편리함만을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넘어서 전체 공동체 나아가 인류의 삶을 생각할 것인가. 혹은 이렇게 노골적으로 물어도 좋다.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의 비극을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효율이 떨어지더라도 비극의 씨앗 자체를 제거할 것인가.


앞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안정된 삶의 조건을 물려줄 의무가 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자식들에게 고통을 선사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원전이 줄어들고 장기적으로 원자력 발전이 폐기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많은 불편함이 찾아들 것이다. 이런 불편함을 감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이윤을 확보해주겠다는 정부와 자본의 논리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제 불편함 정도는 기꺼이 감내하도록 하자. 순간의 불편함은 심할지라도 그 열매는 무척 달 테니까 말이다. 지상에서 우리가 사라진다고 해도 이 지상에 사라지지 않을 희망과 행복을 심었다는 것만큼 보람찬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방진 마스크 쓰고 원전반대 기자회견(경향DB)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원자력 발전을 막을 수 있는가 막연하기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적을 알면 적을 이길 수 있는 법이다. 원자력 발전을 추진하는 정부나 자본의 논리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저항을 통해 원전 발전 비용을 급격하게 올리는 것밖에 없다. 정부나 자본의 최종 잣대는 효율일 테니까 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이 가진 편리함과 기득권을 일정 정도 내려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원자력 발전이란 치명적 위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인류애적 용기와 실천적 의지로 무장해야만 한다. 이런 용기와 실천을 갖출 때에만 우리는 다음 세대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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