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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이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이미지는 체제가 우리를 훈육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모든 훈육이 그렇지만 훈육을 통해 체제가 의도하는 것은 자발적 복종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자발적 복종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채찍이나 당근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체제는 역사를 통해 너무나 잘 배웠던 것이다. 어떤 노예도 당근이 없거나 채찍이 너무 가혹하면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당근이 없어도 채찍이 가혹해도 도망갈 줄을 모른다. 오히려 당근과 채찍이 있는 곳으로 기꺼이 기어들어가려 한다. 직장에서 해고될 때, 우리는 다른 직장을 찾아 노동자의 삶을 영위하려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제 더 이상 감시할 필요가 없다. 자발적 복종의 시대에서 감시는 체제가 직접 하기보다는 지배되는 개개인들이 스스로 알아서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노예들을 감시하던 감시자가 이제 개개인의 내면에 이미지의 형태로 각인돼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발적 복종이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 그것은 체제가 원하는 것일 뿐이니까. 그래서 푸코가 이야기한 것처럼 훈육이 중요하다. 훈육이란 내면에 감시자를, 즉 특정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욕망의 이미지로, 이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염려의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 이미지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우리 내면에 각인시키도록 만든다.


욕망의 이미지는 자본주의가 상품을 사도록 유혹하는 차별의 이미지일 수도 있고, 인간이 자기 자신을 훈육하도록 유혹하는 성장의 이미지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명품 가방을 들고 있는 어느 모델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사진이나 영상을 떠올려보자. 나도 저 가방을 들고 있으면 매력적일 수 있을 것만 같다. 사기 힘든 명품 가방을 구입하는 순간, 우리는 저 섹시한 모델처럼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멋진 사람이 될 것만 같다. 이것이 바로 차별의 이미지다. 차별의 이미지가 상품, 즉 대상과 관련된다면, 성장의 이미지는 우리 자신과 관련된다. 스티브 잡스의 이미지 혹은 젊은 나이에 학계에서 주목받는 학자의 이미지 등을 보면서, 스스로 그렇게 주목받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성장의 이미지가 자기계발 의지를 작동시키는 이미지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명품가방 루이뷔통.


“나는 가질 수 있다” 혹은 “나는 될 수 있다”는 의지를 각인시키는 욕망의 이미지와 달리, 염려의 이미지는 과도한 부정성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안 좋은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염려의 이미지는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이웃을 감시하는 폐쇄회로(CC)TV가 제공하는 이미지는 항상 이웃이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혹은 스스로 잘못 행동하면 타인이 자신을 범죄자로 지목할 수 있다는 염려를 낳을 수 있다. 혹은 유전공학의 도움을 받은 첨단 진단장치들이 제공하는 이미지는 항상 자신이 질병에 걸릴 수 있다는 두려움을 만들기도 한다. 물론 진단을 통해 아무런 병적 징후도 찾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의사는 우리에게 걱정스러운 듯이 말한다. “아직 질병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언젠가 질병이 등장할 수 있으니, 계속 몸상태를 관찰하도록 하지요.” 이 말을 듣고 우리가 질병에 걸릴 수도 있는 암담한 미래를 염려하지 않을 재주가 있겠는가.


일러스트 _ 김상민

▲ “노력이 미래의 결실을 약속하는

미래 시제는 차라리 행복

미래완료 시제에서 ‘결실’은

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막막하기만”


욕망의 이미지든 아니면 염려의 이미지든 체제가 만들어 우리에게 각인시킨 이미지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리의 내면에 특정한 미래를 꿈꾸거나 두려워하는 미래완료라는 시제를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미래의 불특정한 시점에서부터 그것보다 더 미래인 ‘그 날(the day)’에 완료되는 시제가 바로 미래완료 시제다. 명품을 사는 날이 ‘그 날’일 수도 있고, 과장으로 혹은 부장으로 승진하는 날이 ‘그 날’일 수도 있다. 혹은 도둑이 들어 집 재산을 모두 털어가는 날이 ‘그 날’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말기암 진단이라고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는 날이 ‘그 날’일 수도 있다. 미래의 어떤 불특정한 시점이 중요하다. 취업하는 데 성공한 날일 수도 있고, 자기계발과 관련된 학원에 등록하는 날일 수도 있고, 사설 경비업체와 계약한 날일 수도 있고, 아니면 검게 그을린 삼겹살을 먹는 날일 수도 있다.


미래완료 시제는 미래 시제보다 우리를 현재가 아닌 미래에 더 살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다. 단순한 미래 시제라면 지금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 우리는 가을에 풍년을 맞게 된다고 믿으면 된다. 현재의 노력이 미래의 결실을 약속하는 셈이다. 그나마 미래 시제가 지배하던 시절에 살던 우리 조상들은 행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미래완료 시제에서 ‘그 날’은 여전히 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막연하기만 하다. 성공과 승진은 학연과 지연이 같은 상사가 부임하는 어느 날에서부터 올 수도 있고, 자신에게 맞는 자기계발서를 서점에서 구하는 어느 날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 혹은 말기암 진단을 받는 ‘그 날’은 회식자리에서 검게 그을린 삼겹살을 먹게 되는 어느 날에서 올 수도 있고, 경기 호황으로 야근이 빈번해질 어느 날에서 싹이 날 수도 있다.


미래완료 시제에서 우리는 ‘그 날’보다는 ‘그 날’과 현재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는 불특정한 어느 시점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현재와 ‘그 날’을 설정한 것이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사실을 까먹게 되는 것도 다 미래 시제가 갖는 이런 특이성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불특정한 미래의 어느 시점을 포착하는지의 여부는 모두 개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지게 된다. ‘불행히도 당신은 명문대학에 진학하지 않았군요’ ‘그 업체 말고 다른 경비업체를 골랐다면 되었을 것을’ ‘돈이 좀 들더라도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셨어야 했는데’ 등. 체제나 구조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느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예견된 ‘그 날’을 이루거나 미룰 수 있는 불특정한 미래의 어느 기회를 스스로 놓쳤다고 절망하면서 그들은 쓰러져갔던 것이다.


‘그 날’로 완성되는 그 불특정한 시점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욕망이나 염려를 강화시키는 것 아닌가. 여기서 욕망의 이미지인지 염려의 이미지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미래완료 시제를 낳는 이미지는 현재라는 시제를 증발시키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염려 사이에 우리를 던져 놓아 버린다는 점이다. 현재가 타자와 교류하는 시제라면, 미래완료는 파편화되어 고독하기만 한 내면, 혹은 관념만의 세계를 만들게 된다. 언제 올지 모를 ‘그 날’을 소망하고 염려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친구와 만나서 교감을 나눌 수 있다는 말인가. 현재를 잡고 향유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미래완료 시제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가수 사이 (경향DB)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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