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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드리 동백숲길에 서서

그 이름 기억나지 않으면

봄까지 기다리세요.


발갛게 달군 잉걸불 꽃들이

사방에서 지펴진다면

알전구처럼 밝혀준다면


그 길

미로처럼 얽혀 있어도


섧디설운

이름 하나

기억 하나

돌아오겠지요.


노향림(1942~)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둘레가 한 아름이 넘는 동백나무들이 빗살처럼 촘촘하게 늘어선 숲길이 있다. 그 숲길을 걸으며 한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그이와의 기억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 사람의 이름은 아득하게 멀어졌다. 미로 속으로 사라졌다. 시인은 그 숲길에서 봄까지 기다리라고 말한다. 이글이글하는 불과도 같은 붉은 동백꽃들이 피는 봄까지 기다리라고 말한다. 동백꽃들이 알전구처럼 환하게 피어나면 시간의 미로 속으로 사라졌던 그이의 이름과 얼굴과 기억이 다시 돌아올 것이기에. 그리워하면 동백숲길은 우리의 잃어버린, 부서진 옛 시간을 되찾아주고 회복시켜줄 것이기에. 아주 잊히는 것은 없고, 그리워하면 저 먼 곳에서 다시 봄처럼 옛사랑의 기억은 돌아올 것이기에. 

최근에 새 시집을 펴낸 노향림 시인은 ‘시인의 말’을 통해 “누가 그랬던가, 시의 씨앗을 사람들 마음 안에 다 틔워주는 일이 시인의 사명이라고. 시간 속에서 잊혀가고 소외된 시의 본적지로 나는 오늘밤도 푸른 편지를 쓰리”라고 적었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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