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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는 그릇이 아니어서 물에 헹구거나 부실 일도 없다


다만 바람이 들어 와

그의 등짝을 어루만지고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추썩거리기도 한다.


또 아랫마을 개 짖는 소리가 와 들썩들썩 들쑤시지만 꼼짝을 않는다.


일체가 변하지만 변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은 변할 리 없다고 

시름이 홀로 깨어 먹 갈고

반야경이나 베껴 쓰는


그 곁에

이 새벽녘 고요는 뼈나 근육도 없이

그냥 그대로 그린 듯 앉아 있다.


홍신선(1944~)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시인은 새벽녘에 깨어 홀로 고요와 마주한다. 고요는 한 사람처럼 시인의 방에 앉아 있다. 물론 고요는 조용하고 잠잠한, 하나의 상태일 뿐이지만. 바람이 불어 들어올 때나 개 짖는 소리에도 개의치 않고 고요는 고요를 유지한다. 그것들이 고요를 깨트릴 수 없다는 것은 새벽녘의 이 고요가 얼마나 깊고 견고한 고요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시인은 고요 곁에서 경전을 베껴 쓴다. 스스로 고요한 심경에 이르기 위해서. 시인은 이 시의 창작 배경에 대해 “고요를 앞에 하다 보면 마치 비 갠 아침 녘 사물처럼 내가, 내 둘레가 한결 선명하게 보인다”라고 썼다. 큰 바람과도 같은 소란이 잦아들도록 하는 것이, 내면의 평온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팔풍(八風)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이 있다. 유리하고 불리한 것, 나쁜 평판과 좋은 평판, 칭찬을 받음, 속임을 당함, 고통을 겪음, 즐거운 일 등에 흔들리지 않을 일이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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