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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중순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입이 결정된 쌍둥이 딸들을 위해 한 달간의 유럽 인문역사기행을 떠났다. 부다페스트를 기점으로 빈, 잘츠부르크, 뮌헨, 뉘른베르크, 바이마르, 베를린, 드레스덴, 프라하, 브라티슬라바의 순으로 유럽 중부를 일주하는 여행이다. 지금은 예정된 길의 절반을 마치고, 베를린의 민박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부다페스트를 떠나 빈을 지나, 꽃같이 예쁜 잘츠카머구트의 마을들을 돌면서 뮌헨에 도착하여, 3개의 미술관(피나코테크)과 16세기에 빌헬름 5세가 설립한 궁정 맥주양조장에 기원을 둔 세계 최대의 맥줏집 ‘호프브로이하우스’를 찾았다. 이 맥줏집에서 1920년 2월24일, 히틀러와 그 동지들 2000여명이 모여 ‘나치’로 약칭되는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의 창당을 선언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패배하고 곤궁과 굴욕 속에서 분노에 찬 독일인을 향한 거짓과 극단적인 선동으로 세력을 확장한 히틀러는, 1933년 1월 총리에 임명되자 일당독재를 실시하여 수권법으로 초헌법적 권력을 장악하고 무서운 광기의 정치를 시작했다.

뮌헨에서 북서쪽으로 20㎞ 떨어진 곳에 1933년 3월 만들어져 모든 나치 강제수용소의 기준이 된 다하우(DACHAU) 강제수용소가 있다. 몇 차례의 독일 여행에도 강제수용소를 가보지 못한 나에게는 첫 수용소 방문이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반인도적 범죄(Crime against Humanity)에 대해서는 사진·영상과 서적 등 방대한 자료에 의해 너무 잘 알려져 있으나, 실제 현장 체험은 신체적으로 실감을 하게 되고, 새로운 발견과 인식이 있게 마련이다.

숲속에 홀로 서 있는 매표소에서 꽤 떨어진 지붕 위에 망루가 있는 하얀 2층짜리 정문(Jourhaus)에 도착했다.

‘Jourhaus’는 당직실이라는 뜻인데, 위병소와 신체검사실을 겸하고 있으며, 1층 정면의 철책문에는 쇠를 구부려 만든 “Arbeit macht frei(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녹슨, 황폐하고 냉혹한 문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 문은 모든 수용소에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은 기만과 프로파간다를 일삼았던 나치다운 표어다.

인간의 생존과 창조의 근원인 노동을 철저히 조롱하고, 인간 착취의 수단으로만 도구화한 나치의 수용소에서 노동에 의해 자유를 얻을 수는 없었다. 유일한 해방은 죽음뿐이었다.

1933년 3월22일 나치는 일찍이 화약고와 군수품을 생산하던 공장터에 수용소를 개설했다. 이 공포의 감옥은 독일이 패전할 때까지 12년간 유지되고, 수용소와 지소에 40개국에서 온 2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수용되어, 적어도 4만1500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죽고, 고문으로 살해되고 수감생활로 말살되었다.

나치의 수용소는 집단적 살해를 위한 ‘말살수용소’와 독일 일류기업들의 막대한 군수생산의 말단을 맡은 ‘노동수용소’, 그리고 구금을 주목적으로 한 ‘강제수용소’로 분류된다.

다하우 수용소는 주로 정치범을 수용했으며,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유태인의 비율은 많지 않았다. 1945년 4월26일, 미군이 왔을 당시 수용자는 다하우 수용소와 지소에 6만7665명이었다. 그중 4만3350명은 정치범으로 분류되고, 2만2100명만이 유태인이었다.

1933년 개소되자 먼저 나치에 반대하던 공산당원과 사회민주당원 등 정치범이 수용되었으며, 그 이후 범죄자, 반사회적 분자, 신티·로마(집시), 성적 소수자, 부랑자, 성직자, 슬라브인, 유태인 등이 차례차례 수감되었다. 수용소는 SS(친위대)에 의해 관리되어, 대소련전쟁 발발 후에는 140군데나 되는 수용지소와 함께 주로 항공기산업의 일익을 담당했다.

정문을 지나면 넓은 광장을 끼고 오른쪽에 지금은 전시장으로 되어 있는 매우 기다란 다목적 공간과 목욕실이 있으며, 왼쪽으로 30여개의 수용동과 병동이 있다. 한 수용동은 3층 나무침대를 빼곡하게 넣은 네 개의 방으로 나누어지고 정원이 200명인데, 전쟁 말기에는 2000명이나 밀어넣었다고 한다.

을씨년스러운 넓은 목욕실은 벽에 수도꼭지의 흔적도 있고 욕조 같은 것도 있어서 목욕시킨다고 속이고 독가스를 틀어 수용자를 학살한 광경이 자꾸 떠오르곤 했는데, 다하우에서는 독가스에 의한 계획적 말살은 없었으며, 말살 대상자는 아우슈비츠와 같은 다른 수용소에 보냈다고 한다.

목욕실에서 머리와 체모를 밀고 소독하고 씻긴 수용자는 몸에 맞지 않는 수용자복과 나막신을 지급받은 다음, 옷에 수용번호와 삼각형의 표식을 스스로 꿰매어 붙여야 했다.

이 표식이야말로 수용소 내의 처우와 생존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초록색은 일반 범죄자, 빨간색은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 분홍색은 동성연애자, 보라색은 여호와의 증인, 갈색은 집시, 흑색은 사회적 유해분자, 노란색의 삼각 표식에 역삼각의 표식을 끼워맞춘 ‘다윗의 별’ 모양 표식은 유태인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세분되어 있지는 않았다.

다만 좌익수는 붉은 번호표와 붉은 플라스틱의 표지판을 달고, 사형수는 플라스틱의 붉은 삼각, 무기수는 사각의 표식을 왼쪽 가슴 번호표 위에 달았다. 일반 사형수는 초록색 삼각형 표식이고, 무기수가 되면 네모로 바뀐다. 한국 감옥에서는 좌익수는 빨간 표식을 달고 가장 강도 높은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물론 이것은 냉전·분단시대의 표상이며, 이 배경에는 국가보안법의 존재와 보안관찰법의 존재가 있다.

나는 붉은 삼각 표식을 가슴에 달고 살았던 1970년대 초를 회고하면서 반세기 지나, 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된 지금도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한국과 붉은 삼각 표식이 이제는 기념과 기억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긴 독일의 현실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하우는 1945년 4월29일 미군부대가 해방시켰으며, 미군은 이를 귀환대기소로 하고 7월부터는 나치 용의자의 유치장으로 이용했다. 그 후 주정부가 난민캠프로 사용하다가 생존자들의 노력에 의해 1955년에 탈다하우 국제위원회가 만들어지고 과거의 감옥이 기억과 기념의 장소로의 전환이 검토되어, 수용자의 고통과 죽음을 기억하고 나치의 범죄를 분석·연구하기 위하여, ‘다하우 강제수용소 기억의 터’로 1965년에 오픈했다.

<서승 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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