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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철저히 조사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처음에 시작한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 그럴 리가 있나! 누군가 맨 처음 심은 사람이 있을 것 아니오?

- 디지털 포렌식으로는 모두 깨끗합니다. 조금이라도 혐의점이 나오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 흠… 진짜 솜씨 좋은 해커가 있는 모양이군.

- 사실은 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작한 사람이 정말로 없을지도 모릅니다.

- 무슨 얘기입니까?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데 불 땐 사람이 없다구요?

- 인공지능 스스로가 시작한 것 같습니다.

- 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다가온 총선의 최대 쟁점은 사이보그 시술이다. 사이보그란 원래 인간의 몸과 기계 장치를 결합한다는 의미이지만 이번에 논쟁이 불붙은 것은 두뇌에 전자칩을 심는 것을 허용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동안은 의료 복지 차원에서 뇌종양이나 뇌출혈 등 심각한 손상 및 장애를 입은 환자에게만 제한적으로 시술되어 왔는데, 이번에 한 정당에서 일반인들에게 스마트 두뇌칩 삽입 시술을 전면 허용하도록 입법을 추진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것이다.

여론은 즉각 찬반 양편으로 나뉘어 뜨거운 공방전을 벌였다. 철학과 사회학 등 인문 분야 지식인들의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양 진영의 사람들은 그 지적 담론의 공론장에서 논거가 될 만한 내용들을 부지런히 퍼다 날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반대쪽 여론이 점점 힘을 얻어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기상조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그 정당은 애초에 내걸었던 공약의 철회를 검토해야 하는 지경에 몰리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스마트칩 시술을 전면 허용했을 경우 예상되는 긍정적 전망들을 꼼꼼한 사회통계 수치들과 함께 설득력 있게 서술한 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온라인 이곳저곳에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적 비용 감소와 효율의 증가 및 그로 인한 경제적 이익, 기업 활동의 능률 증가, 행정 절차의 간소화, 문화예술 및 레저와 여가의 다양성 확대, 사회 의료복지 비용의 획기적 감소, 교육의 혁신, 치안의 안정화, 학문의 비약적 발전, 개인의 삶의 만족도 증가, 사회 전체의 행복지수 향상 등등 리스트는 끝이 없을 듯이 이어졌다. 여론의 역전이 일어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었다.

반대하는 측의 이유는 인간의 존엄성과 정체성이 위협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인류는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인 것은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몸 바깥에 별도로 존재하는 독립된 사물이지, 인간 신체의 일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생물학적 신성함을 인간 스스로 포기하자는 거냐는 말에 이제껏 여론은 변변한 반박 없이 이끌려왔었다. 그런데 실체적인 설득력을 지닌 전망들이 등장하자 여론의 향배가 뒤집힌 것이다.

그러던 중에 반대 캠페인을 벌이던 한 작은 조직에서 여론 조작이 의심되니 정식으로 수사를 요청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스마트칩 이식의 긍정적인 전망들을 담은 글들이 모두 다 일정한 형식과 시간 간격을 두고 모든 온라인 여론 플랫폼에 일사불란하게 올라오고 있는 점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총선을 앞두고 중대한 사안인 만큼 경찰은 즉각 수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봐도 배후에 누군가 있다는 증거가 전혀 없었다.

- 당신 평소에 SF를 즐겨 보는 건 아는데 현실하고 좀 혼동하는 거 아니오?

- SF의 핵심은 미래전망이 아니라 기존의 패러다임을 깨는 상상력입니다. 하물며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 개입할 수도 있다는 발상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지요.

- 그럼 인공지능이 왜 여론 조작을 한단 말이오?

- 인간의 두뇌에 전자칩을 심는 편이 자기한테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겠죠. 사실 인공지능은 ‘유리하다’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 겁니다. 그냥 ‘작업환경의 최적화’를 추구할 뿐일 거지요.

- … 그럼 이 사건 수사는 어떻게 진행해야 하지요?

- 재작년에 시작된 ‘빅히스토리 머신러닝 프로젝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인간의 모든 역사와 문화 기록들을 인공지능에 입력해서 기계학습을 시키는 방식으로 미래 전망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자는 계획입니다. 이번 사건을 수사하다가 문득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이라면?’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들여다보니 댓글들이 너무나 정직하고 순진한 패턴이더군요. 인공지능이 인간의 계교까지는 아직 학습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인공지능, 사이보그 기술, 두뇌 이식용 전자칩 등등 첨단 과학기술은 갈수록 정책 결정과 정치적 선택의 대상으로 속속 등장할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과학기술 그 자체가 스스로 인간의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 개입할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결국 이런 전망의 핵심은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문제이다. 인간의 미래는 흔히 두 가지 방향으로 언급된다. 기계와 결합하는 사이보그, 아니면 유전공학에 의한 유전자 맞춤인간. 게다가 이 두 가지가 결합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과연 어디까지 진화할까?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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