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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8 위안부 합의(이하 ‘합의’)의 파기와 재협상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은 무너져버렸다. 작년 말 공약 실천을 위해 ‘합의’ 내용을 조사하는 태스크포스(TF)가 구성되었고, 그 조사 보고서에 따라 지난 9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피해 할머니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합의는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해결이 아니다”라며 “일본 정부가 화해·치유재단에 출연한 10억엔을 우리 정부 예산으로 충당하겠다”고 발표했다. TF의 보고서는 그 외에 이면 합의를 하고도 정부가 국민에게 거짓말했다는 점,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과정의 문제 등도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연초에 청와대로 할머니들을 초청해서 “진실과 정의의 원칙에 어긋났고 내용과 절차가 모두 잘못된 것”이라며 ‘합의’ 파기를 강하게 시사했으며,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를 가장 대표적인 외교적 ‘적폐’로 규정했다. 그에 대해서 일본에서는 ‘합의’가 파기될까 봐 크게 반발했다. TF의 보고서가 나오자 강경한 항의를 했을 뿐만 아니라 아베 총리의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불참 카드까지 만지작거리며 위협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가 크게 흔들리고 한·일관계의 중요성과 ‘미래지향’을 방패로 삼아 꼬리를 내린 격이 되었다. 거기에는 내적으로는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를 확보하고, 북·미대화, 한반도 평화 실현까지 전망하면서 올림픽의 성공을 위하여 일본이 재를 뿌리는 사태를 피하고 싶은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강 장관은 “양국 공식 합의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어 재협상은 요구하지 않겠다”며 “일본 스스로 국제 기준에 따라 진실을 인정하고 피해자의 존엄을 회복하며 상처 치유를 계속해 줄 것”을 요구했다. 피해자들의 바람이 “자발적이고 진정한 사과”라는 점도 덧붙였다.
그런데 보고서의 내용을 뜯어보면, 그동안 한·일 양 정부의 협상에서 과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점으로 지적돼온 일본 총리의 사과 표명과 정부 공금으로 할머니들에 대한 보상금 지불이 주안점으로 논의되어, ‘합의’가 만들어진 것이 드러난다. 따라서 문제는 협상 과정의 불투명성과 문제 해결의 요건을 사무적으로 충족하려 했던 것, 진정성이 없었던 점일 것이다. 억지 춘향으로 영혼이 없는 합의를 한 배경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여성인권 문제로 보고 일본을 비판하는 압도적인 국제적·국내적 여론에 대처해야 했으며, 세계 패권을 추구하고 북한을 포위하는 미국이 한·일 갈등이라는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강력한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베는 마음에도 없는 합의에 쓴 탕약을 마시듯 동의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도 요식행위로 합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 대통령은 한·일 협상의 내막을 알게 되고, 일본의 반발과 그 배후에 있는 미국의 눈치도 고려해, ‘미래지향’이라는 과거를 은폐하는 상투어를 사용하면서 재협상 요구나 파기 선언을 하지 않고 협상 내용을 일부 수정하는 어정쩡한 봉합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할 말을 잃어버린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존엄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해 정부가 모든 노력을 해나가겠다”고 위안부 문제를 마음 상처 문제로만 왜소화하니, ‘합의’에 대한 전면 검토는 용두사미가 된 것이다.
물론 마음의 치유도 필요하지만,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래 30년 가까이 싸워 오고, 이미 역사적 정의 실현의 주인공이 된 할머니들은 이미 마음의 치유가 필요한 존재라기보다 오히려 전쟁과 군대, 일본군국주의의 범죄를 고발하는 운동의 주체가 되었으니, 정부가 마음의 치유로 문제를 절하하는 것은 오히려 할머니들을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한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촛불민심 및 대선 공약과 미·일의 압력이라는 ‘현실 정치’ 사이에서 고민한 문 대통령이 결국 ‘합의’에 반대하는 쪽도 찬성하는 쪽도 만족시키지 못할 어정쩡한 결론을 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아베에게 그의 정당성과 힘의 위력에 대한 자신감만 심어준 결과가 되었다. 1월15일 요미우리 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합의’에 대한 한국 정부의 추가 요구를 거부하는 일본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이 83%, 문 대통령의 방침을 납득할 수 없다는 사람이 86%, 한국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78%에 달했다. 즉 대일관계 중시를 내걸고 ‘합의’ 파기에서 물러선 문 대통령의 정책이나 심정이 일본인에게 전혀 이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대 가장 모욕적인 반발을 사고 있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국내에서도 공약 파기의 비난을 받고 대일관계에서도 ‘악법도 법’이라는 식으로 ‘국가 간의 약속’을 존중한 결과, 오히려 당치도 않은 욕을 먹게 된 것이다.
정부가 이면 합의를 드러낸 것에 대해서 국내 보수언론도 일본에 발맞추어 ‘한·일관계를 훼손’했다느니, ‘조약상의 비밀을 드러내면 국가 간의 신의를 금가게 하고, 외교적 예의에도 어긋난다’느니 하고 있다. 비밀조약이란 국가권력이 왕이나 소수 특권자에게 장악되어, 음모적으로 국익의 이름으로 그 자들의 개인 이익을 추구했을 때에 쓰여왔다. 국민이 주권자로 인식되는 시대에서는 구세기의 유물이고 매우 유해한 것이다. 이번 ‘합의’뿐만 아니라, ‘사드’ 문제, ‘이명박과 UAE의 비밀군사동맹’ 등 문제가 부지기수다. 외교뿐만 아니라 이때까지는 일반 국민에게는 알릴 필요 없다던 군사안보 문제까지도 국익이니 기밀이니 하는 말로 주권자의 눈을 피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러모로 ‘합의’는 한일협정과 같은 기본구조를 가지고 있다. 불의의 베트남전쟁에 한·일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국이 한·일 공조를 압박했으며, 일본이 그 틈을 타서 일본의 식민지 청산이라는 원래의 뜻을 왜곡하여 일제의 강점에 대한 면죄부를 만들고, 독도문제도 화근을 남긴 것이다. 무엇보다 그 후 문제점이 드러났음에도 국가 간의 약속이라고 해서, 그냥 오늘까지 살아 남은 것이다. 그런 논리라면 ‘합의’도 마찬가지로 영원한 우리의 족쇄가 될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주권시대의 정권으로 주권자를 존중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정치로 압도적인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다. 일부 외교 ‘전문가’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정정당당하게 일본을 대해야 할 것이다.
<서승 리쓰메이칸대 코리아연구센터 연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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