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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토리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졌는지, 혹은 써나갈 수 있는지에 따라 정치인과 정당의 품격과 앞날이 갈린다. 스토리라 함은 살아온 이력도 되겠지만, 더 넓게 말하자면 정치인과 정당이 말하고자 하는 정치 철학이나 비전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는 정치인은 한 단계 올라서게 마련이다. 자신만의 스토리로 국민을 설득하거나,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야기가 없는 정치인과 정당들은 제자리에서 맴돌다가 종국엔 후퇴했다. 이들의 장점을 굳이 꼽는다면 자극적 언사를 통한 주의환기, 반대를 위한 반대에 능하다는 것이다. 여론몰이를 위해서 언제 치고 빠져야 하는지에 대한 동물적 감각도 남다르다. 이들은 스스로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기보다 기존의 공고한 패러다임에 찬성이나 반대 ‘댓글’을 달거나, 다른 정치인이나 정당의 이야기에 악플을 다는 식으로 생존해왔다.
정치의 세계가 황량한 이유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이야기 없이 ‘댓글’을 달아 정치생명을 연명해온 정치인이나 정당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댓글 정치인들은 철학의 빈곤을 덮기 위해 다른 정당이나 정치인의 스토리에 비판과 조롱의 악플을 달고 지역주의·보수언론·색깔론 등 기득권 패러다임에는 ‘좋아요’를 눌렀다. 댓글 정치인들이 늘어날수록 정치판은 뒤로 후퇴했다.
특히나 118석의 제1야당 자유한국당이 ‘댓글 정당’의 전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한국 정치의 비극이다. 한국당은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꾸면서도 기득권에 댓글을 달며 버텨왔다. 보수언론 주장에 적극적으로 찬성 댓글을 달았고, 반대진영을 향해선 색깔론 악플을 달았다. 선거가 불리하다 싶으면 지역주의를 불러내 ‘우리가 남이가’ 댓글을 달았다.
한국당이 자기최면 걸듯 반복 중인 ‘5월 민심 폭발설’도 댓글 정치의 한 사례다. 집값 폭등·최저임금 인상 부작용 등으로 민심이 악화되고 있다는 보수언론 주장에 한국당은 타당성 검증 없이 좋아요를 눌렀다.
댓글 정치인으로 한국당 홍준표 대표를 빼놓으면 섭섭할 것이다. 반대편을 향한 막말과 갈라치기에 능한 그는 정치권 제1의 악플러다. 심지어 지난 22일 신년회견에서도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모든 혼란과 퇴행의 원인은 바로 문재인 정권의 좌파 국가주의”라고 주장했다. 새해 비전을 말해야 하는 회견을 색깔론으로 채웠다. 그가 욕을 먹으면서도, 대구에서 당협위원장을 맡은 것도 지역주의에 댓글을 달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변방’ 출신의 자수성가 정치인이라고 포장했지만 실상은 온갖 기득권에 기대려는 댓글 정치인에 불과하다.
그나마 댓글 정치인은 차악이다. 최악은 거짓 이야기로 혹세무민하는 경우다. 이명박은 ‘다스는 내 것이 아니다’ ‘BBK는 나와 무관하다’는 거짓말로 대통령이 됐다. 박근혜는 대필 작가 최순실이 만들어낸 ‘국가와 결혼한 사심 없는 지도자’라는 허구의 스토리로 국민을 속였다. 둘의 가짜 스토리는 국정농단으로 귀결됐다. 책임은 이들을 걸러내지 못한 친정 한국당에 있지만, 댓글 정당에 검증능력을 기대하는 것은 사치일지 모른다.
‘한국당을 문 닫게 하겠다’는 가칭 통합개혁신당은 또 어떤가. 애석하게도,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나 바른정당 유승민 대표의 처지는 한국당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어 보인다. 안 대표는 ‘새 정치’라는 주제를 내세웠으나, 정치입문 6년째인 지금도 본문을 채워넣지 못하고 있다. 유 대표는 ‘보수 개혁’을 내걸었지만, 한국당과 차별되는 스토리를 쓰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
게다가 두 사람은 통합행보를 한다며 문재인 정부 때리기에 올인하고 있다. 정부와 1 대 1 구도를 만든다는 정치공학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지만, 그 탓에 둘의 메시지는 반대 댓글을 다는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두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정치관이나 국가관, 미래비전은 들리지 않는다. 두 사람이 말하는 통합개혁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면에서 둘은 그토록 경멸했던 홍 대표의 모습과 비슷해지고 있다.
댓글로는 일어설 수 없다. 잠시의 눈속임은 가능할지언정 마음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당의 몰락, 두 전직 대통령의 국정농단이 이를 입증한다. 여의도의 수많은 댓글 정치인들에게 다음 문구를 권한다.
“제발 당신의 이야기를 하라. 정히 생각이 없고, 할 말이 없으면 그 시간에 라면 가닥이라도 길게 붙들고 오래오래 삼킬 일이다. 그 시간만큼이라도 세상이 조금 조용해지지 않겠나.”(류근,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이용욱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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