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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먼다오(金門島)가 어딘데요?” 이야기할 때마다 되돌아온다. 내 어릴 때,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한반도의 운명과 샴쌍둥이처럼 묶여 있었던 섬. 이제 70년의 세월 속에 냉전의 상징, 진먼이 잊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르겠으나, 격렬한 포격전의 이면에서 끊이지 않게 이어간 끈끈한 국민당과 공산당, 중국과 미국의 인연, 그리고 2001년의 ‘소삼통’(중국과 대만은 2001년부터 진먼과 마조(馬祖) 지역에 한정해서 ‘상거래, 교통, 우편’의 자유화를 실시했으며, 2004년의 대삼통으로 이어갔다) 이래 ‘냉전의 섬’에서 ‘평화의 섬’으로 놀랍게 거듭난 기적의 섬을 모르고서야 되겠는가? 한반도는 38선에 고착하고, 얼어붙고, 화석화되어 있는데….
1937년 7월7일, 루거우차오(蘆溝橋) 사변으로 일제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자 “거국항일”을 내걸고, 국공합작하여 8년간의 잔혹한 항일전쟁을 이겨내고 중국은 광명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내 중국의 미래를 건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벌어졌다. 1948년 가을 동북에서 제3야전군은 국민당 4개 병단 47만명을 섬멸하고 전국 해방의 결정적인 고지를 점령한 데 이어, 노도지세로 주요 도시를 공략하여 1949년까지 전국을 거의 해방시켰으나 마지막 대만으로 가는 길목에서 그만 걸리고 만 것이다.
진먼은 대소 두 개 섬으로 이루어지고, 인구는 12만명(실제 거주자 5만명), 면적은 151.7㎢로 강화도의 반만 하다. 섬은 중국 푸젠(福建)성의 대도시 샤먼(廈門)의 코앞 2㎞ 지점에 있으며, 대만과는 200㎞ 떨어져 있다.
1949년 10월1일 톈안먼에서 마오쩌둥이 신중국의 탄생을 선언한 직후, 10월25일 자정을 넘어 9000명의 인민해방군이 구닝터우(古寧頭) 등 3개 지점으로 대진먼에 상륙하여 3일간의 혈투에서 6100명이 전사하고 3000명이 포로가 되는 큰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 패인에는 배의 조달 등 인민해방군의 준비 부족, 간만 차가 많은 진먼다오의 지형조건이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것, 셋째로 4만의 병력에 전차를 다수 가진 국민당군에 비해 병력 열세였다는 것, 그리고 일본군의 참전이 있었다. 구 일본군 주몽골군 사령관, 네모토 히로시(根本博) 중장이 장제스에 의해 린바오위안(林保源)이라는 중국이름으로 국민당군 중장으로 임명되어, 일본군 패잔 장교 7명을 각 부대의 지휘관으로 배치하여 전투를 진두지휘하게 했다. 일본군의 참전은 오랫동안 비밀이었으나, 2009년 구닝터우 전투 승리 60주년 기념행사에 네모토의 자손이 초대되어 훈장을 받고 공개되었다.
중국군이 재정비하여 진먼을 공략하고자 했을 때, 6·25전쟁이 터져 중국은 한반도에 출병하여 대만 공략작전에 돌릴 병력이 없어진 데다, 한때 중국 내전에 불간섭을 천명한 미국이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급파하여 대만 문제에 개입했다.
6·25전쟁이 끝나자 1954년에 ‘제1차 대만해협위기’가 있었으며, 1958년 8월23일부터 10월5일까지 중국군이 47만발의 포탄을 진먼에 쏟아부은 ‘8·23 포격전’이 있었다. 국민당군도 지금은 관광지화되어 있는 사자산(獅山) 포진지 등에 사정거리 17㎞, 터지면 반경 87m의 구덩이가 파이는 어마어마한 미제 8인치 포를 오키나와에서 급거 옮겨와서 쏘아댔다. 중국군의 포격은 중·미 수교 직전인 1978년 말까지 20년간 계속되었으나, 섬은 요새화되어 견고해지면서 크게 효과를 보지 못했으며, 1964년 이후 점점 심리전으로 전환되어 갔다. 이틀에 한 번, 홀숫날 저녁 6시부터 7시까지만 포격하고, 포탄의 내용물도 선전삐라, 책자, 문방구, 과자, 배우사진, 돈까지…. 마치 한국에서 탈북자가 띄우는 풍선의 내용물과 흡사하게 되었다.
그와 아울러 중국과 미국은 진먼이나 한반도에서 이렇게 격렬하게 전투하면서 바르샤바에서 비밀회담을 계속했다. 장제스는 맹렬히 반대했으나, 미국은 몇 차례 진먼을 포기하려고 했으며, 마오쩌둥은 마음먹으면 가능한 진먼 공략을 일부러 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진먼을 점령해버리면 대만과 200㎞의 망망대해를 두게 되고, 그렇게 되면 대만의 독립성이 더욱더 뚜렷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 전체의 정통정부를 주장하는 장제스도 대륙반공(大陸返攻)의 상징으로 진먼의 사수를 외쳤으며, 마오쩌둥도 대륙(진먼)과 대만의 연속성을 중시하였으니, 양자는 동상이몽으로 ‘하나의 중국’을 ‘포격을 통한 대화’로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2000년대에 들어서 민진당 정권이 중국에 “진먼의 양보와 대만 독립 승인을 맞바꾸자”고 제안했으나 일축당했다고 한다.
1979년 1월1일에 포격이 멈추고 1992년, 42년 만에 계엄이 해제되었다. 한때 섬 인구의 2배, 10만명을 넘었던 국민당군은 1만명만 남기고 철수하여, 현재는 2000명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한다. 진먼 경비사령부의 군정하에서 군에 예속하여, 온갖 폐단에 시달리면서도 군으로 먹고살았던 진먼은 다른 생계의 길을 찾아야 했다.
계엄 해제 후 대만 정부는 군사시설의 관광화를 허가했다. 그래서 거대한 지하 해군기지나 포대, 심리전 방송국, 초소, 지하벙커, 적 상륙 방해용의 용치, 지하마을, 군사박물관, 포탄 탄피로 칼을 만드는 가게, 국민당군 위안소인 특약다실 등이 관광시설화되었다. 군정 시기 군에 희생한 진먼 민간 영웅들이 군의 피해자로 커밍아웃하는 기억의 역전, 내지는 재구성이 이루어지고 있다. 소삼통으로 진먼은 양안의 중간지대라는 이점을 향유했으나, 대삼통의 시대를 맞이하여 대륙에서 물을 공급하는 파이프라인이 부설되고 샤먼과 다리로 연결되려는 지금, 진먼은 어떤 정체성으로 독자성을 주장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군인의 위락을 위해 만든 ‘진먼 고량주’가 이제 세계의 명품이 되어, 진먼은 대만에서 가장 부유한 현(縣)이 되었다. 현민들은 교육, 복지, 생활의 각종 혜택을 누리고 있다. 진먼에 호적을 두고 있지만 이곳에 살지 않는 7만명은 1년에 1인 7병씩 배당되는 고량주의 매력에 묶여 있다고 한다.
나는 ‘평화의 섬’ 진먼에서 38선 너머를 바라보며, 우리도 ‘전쟁의 땅’에서 ‘평화의 땅’으로 거듭나기를 꿈꾼다.
<서승 리쓰메이칸대 코리아연구센터 연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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