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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나는 결심했다. 오늘도 ‘나만의 전설(傳說)’을 만들겠다고. 그 전설은 나의 심연에서 건져낸 보물이다. 나를 흥분시키며 내가 반드시 가야 할 운명의 길이다. 내가 들어 올리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내가 원하는 여행의 과정이자 목적지이다. 그래서 이 걸음은 여유롭고 동시에 단호하다. 나만의 전설을 위해 매일 걷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그 여정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나의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도 나만의 전설을 성취하기 위해 내가 고용한 트레이너일 뿐이다.

그런 걸음은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를 향해 있기 때문에 순교적이다. ‘순교자(殉敎者)’라는 영어 단어 ‘martyr’는 원래 고전 그리스어에서 왔는데, 그 의미는 다음 두 가지다. 한 의미는 법정에서 ‘자신이 선택한 말이나 행동이 진리라고 증언하다’이며 다른 의미는 ‘숭고한 원칙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 순교하다’이다.

그 순교자가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진리인지 아닌지 객관적으로 증명할 길은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선택한 길이 진리라고 스스로 믿는 것이다. ‘믿음’이란 자신하고 상관없는 도그마에 대해 무조건 동의하는 행위가 아니다. ‘믿다’라는 영어 단어 ‘belief’는 ‘자신에게 소중한 것(lieben)을 헤아려 알고, 그것들을 삶의 우선순위로 놓고 지키려는 삶의 태도’다. 인생철학의 바탕은 자기믿음이다. 자기믿음이 없는 이유는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라는 미국 시인의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은 가장 사랑받는 영시들 중 하나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시를 낭송하였지만, 최근에 새롭게 읽었다. 새로운 의미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먼저 오 행씩 네 단락으로 구성된 시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두 길이 노란 숲에 갈라져 있었다. 두 길 모두 갈 수 없어 섭섭했다. 한 길을 가야 해 한참 서 있었다. 나는 볼 수 있는 데까지 내려다보았다. 그 길이 덤불로 굽어져 가는 곳까지.(1~5행)

나는 똑같이 좋아 보이는 두 길 중 한 길을 택했다. 그 길이 아마도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풀이 많고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내가 그 길로 간다고 할지라도 그곳으로 지나가는 것이 별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6~10행)

그날 아침, 내 앞에는 두 길이 있었다. 낙엽엔 발자국이 없었다. 아, 나는 그 첫 번째 길을 다른 날을 돌아오기 위해 남겨두었다. 그러나 길이 또 다른 길로 이어지기 때문에 내가 돌아올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11~15행)

세월이 많이 흐른 후, 한숨 지며 말할 것이다. “두 길이 한 숲에 갈라져 있었지. 그리고 바로 내가 사람들이 덜 간 길을 택했지. 그것이 내 인생을 바꿨다고.”(16~20행)

나는 이 시를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한 인생에 대한 찬양시로 잘못 해석해 왔다. 이 시를 읽으면서 ‘사람들이 덜 간 길’을 택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최근에 다시 읽어보니 그것이 핵심이 아니다. 시인은 먼 훗날 우리에게 자신이 ‘사람들이 덜 간 길’을 선택했다고 덤덤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가 과거에 두 갈래 길에 왔을 때, 두 길은 ‘똑같이 좋아 보였다’라고 회상한다. ‘사람들이 덜 간 길’은 사실은 ‘똑같이 좋아 보이는 두 길’ 중 하나일 뿐이다. 시인은 아마도 과거에 다른 길을 선택했을지라도, 미래에 그 길을 ‘사람들이 덜 간 길’이라고 확신하고 위안했을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과거나 현재에 선택한 결과일 뿐이다. 이 시는 남들이 선뜻 취하지 못할 길을 과감히 선택한 개인의 성공신화에 대한 찬양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선택한 삶이 최선이었다고 스스로 믿고 싶은 ‘자기기만’에 대한 위안이다.

우리가 선택한 길이 최선이라고 믿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심연의 묵상을 통해 자신만의 길을 선택하는 순간이 거룩하다. 우리에게 진실한 것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진실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기만은 천재성의 시작이며 후회 없는 삶의 나침판이다. ‘자기기만’은 보잘것없는 자신을 굉장한 자신으로 포장하여 남들에게 전시하려는 마음은 아니다. 우리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자신만의 보물을 찾아가는 여행은 숭고하며 감동이다. 왜냐하면 그 여정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들도 자신들의 보물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이슬람 신자들인 무슬림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 기도한다. 메카는 그들에게 자신들이 만들어야 할 전설의 진원지이자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상기하기 위해 메카를 향해 화살표 모양의 표식을 가지고 다닌다. 이 표식을 아랍어로 ‘키블라’(qibla)라고 부른다. 하루에 다섯 번씩, 자신의 마음의 시계를 돌아보고 풀린 마음의 태엽을 감아 자신과 메카를 일치시킨다. 온몸을 바닥에 붙여 오늘도 순교적이지만 숭고한 삶을 다짐한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두 갈래 길에 서 있다. 내가 가야 할 길을 조용히 헤아려본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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