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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는 것처럼 방치했던 서랍도 연초에는 모처럼 햇빛 아래 홀랑 뒤집어진다. 뭐 이리 자질구레한가. 잉크가 말라버린 만년필, 간이영수증 뒷면에 휘갈긴 메모가 툭 튀어나온다. 내가 저지른 소행이 분명하나 물건을 보고서야 어렴풋해지는 사연들. 사무실 앞 상수리나무 근처에서 주운 도토리도 있다. 딱딱해진 도토리를 보는데 양볼이 불룩해지도록 열매를 집어넣는 다람쥐 생각이 났다. 저만의 장소에 먹이를 묻어두지만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다람쥐. 그리고 떠오르는 기억의 한 토막.

몇해 전 자연생태에 조예가 깊은 분들과 송지호 둘레를 탐방했다. 쌀쌀한 날씨에도 뚝뚝하게 버티는 나무들의 동태를 살핀다. 울타리에 자작나무가 도열한 파릇한 보리밭을 가로질러 더듬더듬 되돌아나올 때, 누군가 말씀하시길, 오늘 정말 귀한 사진을 찍었어요, 때까치가 개암나무 가지에 개구리를 잡아서 걸어놓았더군요. 귀에 쏙 들어오는 정보가 아닐 수 없었다. 도회 근방의 얕은 자연 속에서 이런 야생의 다큐멘터리를 목격하다니, 얼른 그곳으로 달려갈 태세를 갖추었지만 너무 먼 거리라 했다. 물회가 기다리는 점심시간도 촉박해서 카메라 속의 사진을 찍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개굴개굴 울다가 웃다가 그런대로 살아온 개구리. 느닷없이 개암나무 가지에 꿰인 채 꾸덕꾸덕 적나라하게 말라가는 개구리를 보는데 한 말씀 보탠다. 글쎄, 저 때까치가 기억력이 나빠 제가 공중에 감춰놓은 것도 대부분 까먹는대요!

쥐들이 한바탕 설치고 간듯 뒤죽박죽 어지러워진 서랍. 앞에 열거한 것 외에도 뜻밖의 품목이 더 있다. 흰 봉투에는 아침·저녁으로 복용하라는 약이 들어 있다. 한구석에서 뒹구는 건 몇 개의 연고들. 녹이야 슬지 않았지만 짜부라지고 뒤틀린, 그렇다고 제대로 다 쥐어짜지 못한 것이다. 당장 눈앞의 서랍 속에서 이 연고는 어쩌면 그리도 내 인생을 꼭 닮았더냐. 소중하게 보관한다고 툭 던져놓고서 그 영문을 까맣게 몰랐던 흔적들. 저 새대가리 좀 보라며 키득키득 웃기도 했던가. 아무튼, 때까치 그리고 개암나무. 자작나무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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