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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쪽같은 나날들이다. 알록달록한 하루가 지나가더니 드디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가 왔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김수영)라고 했는데 나는 올해도 달력만 겨우 바꾸었다. 어수선한 기분을 정리할 겸 옛글을 함께 읽는 동무들과 송년모임을 했다. 서울에서 가장 높다는 북한산 혹은 그 아래 둘째 동생뻘쯤의 인왕산을 찾을까 하다가, 연말답게 방향을 확 바꾸어 버렸다. 서울에서 가장 낮은 곳을 찾기로 한 것이다. 부드럽기 이를 데 없는 물에게 가장 낮은 장소가 한강이라면 자갈 같은 몸을 가진 우리들에겐 국립묘지가 가장 낮은 곳이겠다. ‘그날 묘지에서 뵙겠습니다∼’라는 한 분의 댓글이 새삼스러워졌다.
나이 사십 이후에는 항상 보따리 쌀 준비를 하라는 글을 접한 이래 그 방면의 생각을 아니해온 건 아니었다. 문득문득 죽음이 나를 찾아오기도 하겠지만 내가 그것을 찾아 헤맨다는 느낌도 있다. 이런 궁리를 바탕으로 메모장에서 아직 다 완성하지 못한 글귀를 들고 국립묘지 산책에 나섰다. 그 메모란 다음과 같다. 날이 갈수록 그것이 좋다.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도 아닌 그것. 온기도 물기도 없고 살도 없고 뼈도 없는 그것. 그것이 좋아진다. 산에는 꽃이 피고 그것이 많다. 그저 보아주는 이 없어도 계절은 빈틈없이 차례차례 다녀간다. 식물은 순서대로 꽃을 피운다. 저곳에 그것이 없었더라면 그곳은 텅, 비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것으로 늘 고유하니깐. 올해는 무술년. 내 생애 다시 못 볼 그것이 지금 저기에서 지나가고 있다.
위 대목을 바탕으로 이 코너의 글감을 얻기 위해 두리번거렸지만 꽃은 어디에도 없었다. 전망 좋은 장군묘역에 갔더니 장미 모양의 조화들이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추슬러 보니 빗살무늬토기처럼 밑이 뾰족한 플라스틱 화분이었다. 내처 서달산까지 오르는데 철조망에 붙어 꽃이 아닌 듯 꽃으로 서 있는 건 사위질빵의 마른 열매였다. 할머니 머리카락 같은 흰 열매. 나중 실제로 나를 보따리할 때 쓰면 퍽 어울릴 사위질빵의 줄기가 국립묘지 한쪽의 기슭에서 추위를 칭칭 감으며 악착같이 서 있었다. 사위질빵, 미나리아재비과의 덩굴성 나무.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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