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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여름 끝자락과 가을 어귀에서 추석을 보냈다. 여느 해보다 빨라도 한참 빠른 ‘풋추석’이었다. 그만큼 설렘도 빨랐고 반가움도 빨랐다.

조개 국물로 무쳐낸 시어머니의 나물 솜씨는 여전했다. 아픈 허리를 붙잡고 밤새 끓여낸 친정 엄마의 탕국에는 굵은 토란이 보태졌다. 나물을 친정으로, 탕국을 시댁으로 가져가서 나눠 먹으니 온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명절이란 이런 거다. 누군가는 ‘명절은 시간의 한 매듭’일 뿐이라 하지만 너무 팍팍한 해석이다. 먼길 헤쳐 품어 온 음식을 풀어놓고, 자식의 부모임을 부모의 자식임을 가장 애틋하게 느끼는 때, 연대와 애틋함이라는 의미쯤은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번 추석은 목엣가시 같다. 명절의 ‘연대’와 애틋함 대신 굴뚝에서, 아스팔트에서 고립된 사람들이 자꾸 걸렸다.

세월호 참사가 150여일째다. 자식 잃고 첫 명절, 부모는 먹는 건 고사하고 떡 한 조각도 만들 수 없었다. 쌀 불려 방앗간에서 떡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행여나 가슴에 묻은 자식이 생각날까 싶어서다. 그저 광화문광장에서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이 전 세계에 생중계 되는데 정작 부모는 제대로 된 설명 하나 듣지도 못했다”며 울먹일 수밖에 없었다. 정작 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쥐어짠 건 ‘고립’이었다. 슬픔을 함께하던 국민들이 이제 피로증이라는 말을 꺼낸다. 세월호는 어느 순간 민생 경제와 대척점이 됐다. 내 자식이 왜 죽었는지 알아야겠다는 상식적인 요구는 극단적이고 과격한 구호로 취급받았다. 누가 이 부모들을 광화문광장 안에 꽁꽁 가둬버렸나.

스타케미칼 해고노동자 차광호씨는 경북 칠곡군 구미국가산업단지에 있는 45m 높이 공장 굴뚝 위에 100일 넘게 올라 있다. 2010년 스타케미칼(모회사 스타플렉스)이 한국합섬을 인수한 뒤 힘들게 고용승계를 이뤘지만 공장 기계는 지난해 1월 멈춰섰다. 노동자들은 분할매각, 권고사직이라는 이름에 떠밀려 거리로 쫓겨났다. 그는 굴뚝일기에서 “내 청춘을 바친 공장을 지키기 위해 굴뚝에 올랐다”고 절규했다. 회사와 경찰은 음식 외 생필품 반입마저 막았다. 차씨는 추석을 가족들과 보내지 못했다. ‘장모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에도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경북 칠곡군 구미국가산업단지 스타케미칼 공장 내 굴뚝 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차광호씨의 모습 (출처 : 경향DB)


밀양 송전탑 사태는 비슷한 ‘고립’을 낳고 있다. 경북 청도군 각북면 송전탑, 경북 울진군 신경기변전소 문제가 대표적이다. 주민들은 ‘흉측한’ 철탑 위에 덩그러니 떠 있는 추석 달을 보며 울다 지친 목울대만 셀 수 없이 부여잡았으리라.

고립된 사람들을 여지껏 지켜준 건 또 다른 고립된 사람들이었다. 세월호 부모에겐 아픔을 겪었던 부모들이, 차씨에겐 전국에서 달려온 희망버스가, 청도 할머니들에겐 밀양 할머니들이…. 일본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와 사회비평가 오카다 도시오의 대담집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이 시사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더 절망적인 사람을 돌보라”는 메시지를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또다시 정치다. 전선이 한없이 길어지면 고립되는 건 필연적이다. 단지 연대 의식에만 의지하기엔 사건이 너무 많다. 고립을 막으려면 ‘다수를 얻는 것’이 기본인 정치가 나서야 한다. 그렇다고 정치가 그때그때 중재 역할만 맡으면 고립된 사람들은 늘 목숨을 거는 배수진을 쳐야 한다. 그럼 정치가 뭘 해야 할 것인가. 당장 사회 구석구석에 공감 지대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정치학자인 조인원 경희대 총장은 이를 ‘포월의(포용하고 초월하는) 정치’라고 했다. 조 총장은 “정치는 타인을 포용하고 한계를 초월해야 한다. 그래야 공감 지대를 창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 공감 지대가 법안이든, 범사회적 공감위원회가 됐든 이제 정치가 고립을 막아야 할 때다.


구혜영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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