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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학력은 대학 졸업이다. 무리해서 최종 학력을 끌어 올려봐야 대학원 중퇴가 전부다. 신문기자 시절, 대학에 몸담고 있던 선배의 호의와 강권으로 자의반 타의반 언론홍보대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야간 대학원이었지만 주경야독하는 이들 특유의 열정은 없었다. 강의는 형식적이었고 학생들은 학위 때문에 마지못해 출석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굳이 학위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학비도 안 내니 그냥 다니기만 하면 되는데도 머잖아 그만두었다. 그곳에서 강의를 듣고 학위를 받는 게 내 삶에도, 일에도, 공부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런 학력, 이력을 지닌 내가 지난해 대안연구공동체 학자들과 힘을 모아 대안 대학원을 개설했다. 철학과정과 저술과정을 둔 ‘파이데이아 대학원’이다. 학기마다 신입생을 받아 벌써 3기생을 모집 중이다. 하는 일이라야 청소와 설거지, 복사 따위의 허드렛일이지만 그래도 내가 대학원 과정 개설에 나서다니 소가 웃을 일이다.


제도권 대학원을 어설프게 흉내 낸 건 아니다. 대안 대학원이니 학위는 줄 수 없지만 대학과 여타 인문학 공동체에서 못하거나 하지 않는 것들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나이와 직업, 계층을 넘어 공부에 뜻이 있는 이들과 더불어,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대학의 핵심 기능은 연구와 교수다. 연구는 여러 가설들이나 과제를 탐구하고 토론하며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독자적인 연구 능력이 부족한 학생들은 교수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연구 활동을 경험하며 탐구방법을 배우고 창조력, 비판력을 기른다. 이것이 교수다. 따라서 대학에서의 교수는 연구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강의도 마찬가지다. 강의를 위해서는 상응하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고, 강의를 마치면 저술이나 기타 생산물로 그 결과를 남기는 게 진짜다.


하지만 대학은 물론 요즘 번성하는 대학 밖 인문학 공동체에서도 이 일이 쉽진 않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신으로 군림하는 시장의 위세 탓이다. 이미 자본주의 기업의 하청 업체, 또는 스스로가 돈벌이 기업을 자처한 대학은 그렇다 치자. 학문할 여건을 마련하지 않는 대학 경영자, 열정도 능력도 없는 교수, 대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다니는 학생이 어우러져 상아탑을 벼랑으로 몰아간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대학의 대안을 자처한 인문학 공동체에서조차 시장 때문에 좋은 강의가 불가능하다니 말이 되는가.


현실이 그렇다. 어느 면에서는 인문학 공동체만큼 시장 논리가 극명하게 적용되는 곳도 흔치 않다. 사람들이 찾지 않으면 강의를 아예 열지 못하는 것부터가 그렇다. 강의의 질이야 어떻든 세간의 ‘평’이 좋지 않으면 설 자리가 없어진다. 대학 밖 인문학 공동체의 강의가 대학 강의보다 낫다는 평을 듣는 것에도 슬픈 진실이 담겨있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대중이 좋아하는 말랑말랑한 강좌, 유행이나 트렌드에 영합하는 학자만 살아남을 가능성이다. 물론 인기 있는 강좌에서 돈을 만들어, 인기는 없지만 꼭 필요한 강좌를 개설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가난한 인문학 공동체로서 이마저 쉽지 않다. 학기제 대학원이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는 건 강좌별 참여비가 아닌, 학기별 등록금을 내기 때문이다. 등록금으로 작으나마 여력을 만들어 인기에 관계없이 반드시 필요한 강좌를 개설할 수 있는 것이다. 역량과 열정이 있는 학자라면 수강생이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마음껏 연구와 교수를 하게 하는 것, 이는 제대로 된 학문을 하는 전제이기도 하다. 다석 유영모 선생이 YMCA 연경반에서 평균 다섯 명 안팎, 때로는 단 한 명의 청중을 두고 오랜 세월 강의를 계속하며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을 하나로 꿰는 사상을 창출했듯이. 소쉬르가 5~10명의 학생을 두고 강의하며 20세기 인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저작 중의 하나인 저 <일반언어학강의>를 낳았듯이.



이 못지않게 중요한 대학원 개설 목적은 참여자들이 보다 체계적으로 공부하게 하자는 것이다. 근래 인문학 열풍을 타고 대학과 지자체, 도서관, 백화점, 인문학 공동체 등에 수많은 강좌가 개설되고 있다. 전통 인문학에서 문화 예술 제 분야에 이르기까지 종류와 수준도 다양하다. 하지만 대부분 강연 수준의 단편적인 강의로, 체계를 갖춘 것은 드물다. 참여자로서는 이 나무, 저 나무 여러 나무를 보면서도 숲의 전모는 파악하기 힘든 실정이다. 유행 따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대충 듣는 강의로 제대로 된 공부가 가능할 리 없다. 중요한 건 기본이다. 특히 철학에서 오랜 세월을 거치며 다듬어진 개념과 사유를 익히고 철학사의 전체 구도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공부가 불가피하다.


이제 겨우 1년에 지나지 않지만 ‘파이데이아 대학원’에서는 몇 가지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교수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학교가 되어 강의며 학기를 자율 운영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약 50강에 걸쳐 진행하는 <에티카> 강독이 그렇고, 이보다 긴 시간이 소요될 니체 저작 강독이 그렇다. 동양고전 강독은 사서삼경만으로도 2년가량의 공부가 필요하고 노장철학도 장기 강좌가 불가피하다. 한 교수가 철학 입문에서 전문 분야에 이르는 강의를 차차 수준을 높여 진행하며 이를 통해 철학사의 구도 파악에서 고급 사유를 가능케 하는 실험도 시작했다. 이러니 3월에 시작해 14~16주면 끝나는 현 제도권의 학기제를 따라서는 강의를 할 수 없다. 6개월, 24주 강의를 진행하며 쉬는 건 각 강좌별 교수와 학생이 알아서 하는 식이다. 아직 걸음마 단계니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 연륜이 짧은 탓에 상당수 강좌가 입문이나 유명 철학자의 저작 강독, 수입 이론의 소개에 머물러 있는 것부터가 그렇다. 주경야독하는 대다수 참여자의 여건도 만만치 않다. 언뜻 보아도 가야 할 길은 첩첩산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첩첩산을 넘어 언젠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든 실험하고 만들어가는 지금, 이 자리다. 대안적인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지금, 여기서 우리의 공부와 삶과 세상을 횡단하고 접속하고 융합하는 것이다. 같은 길 걷는 도반과 더불어 우정을 나누며 새처럼 자유롭게, 즐겁게….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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