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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가 그걸 모르나?”


정부의 한 핵심 실세가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서울의 한 사립대 총장이 보였다는 반응이다. 이 핵심 실세는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 그는 박근혜 대통령의 싱크탱크를 이끌며 현 정부의 국정 밑그림을 그린 이로 알려져 있다. 김 원장이 6월27일 경주에서 열린 대학교육협의회 대학총장 세미나에서 했다는 기조 강연의 요지는 공자 말씀에 가깝다.


“창조산업에선 문화 콘텐츠가 중요하다. 현재 시장 수요가 적다고 전통 인문학인 문사철(문학·역사·철학)을 가볍게 생각하는 흐름에 대해서는 고민해봐야 한다. 문사철에 바탕을 둬야 깊이 있고 차별성 있는 내용을 만들 수 있다.”


그는 강연 뒤 기자들과 만나 일부 대학들이 인문학과 통폐합을 하면서 너무 상업적으로 간다고 비판한 것으로 전해진다. “누가 그걸 모르나”란 냉소적인 반응은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대학 구조조정과 재정지원에서 취업률이 절대 지표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취업이 안되는 인문학과의 통폐합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는 것이다.


대학 인문학 위기의 큰 책임은 대학에 있지만 총장들의 항변도 잘못된 건 아니다. 정부가 칼자루를 쥔 ‘갑’이고 대학이 ‘을’인 이상 먼저 바뀌어야 하는 쪽은 정부다. 


대학이 취업을 위한 학원으로 전락하고 교수가 기업에 취업을 구걸하며 동분서주하게 된 책임은 취업률로 대학을 줄 세워온 정부 쪽이 더 무겁다. 따라서 정부가 진정으로 대학 인문학이 살아나기를 바란다면 제도부터 맞게 정비하는 것이 순서다. 인문한국(HK) 사업으로 인문학의 목줄까지 거머쥔 정부가 한국연구재단을 통해 벌이는 선심성 사업으로 살아날 인문학이 아니다. 


인문학의 요체는 심사를 해가며 벌이는 사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자들이 마음껏 연구하고 교수할 수 있게 하는 자유에 있다. 정부 실세의 대책 없는 질타와 대학 총장의 항변 사이에서 말라가는 것은 대학 인문학, 인문학자다.





2. 대안연구공동체에서 30강에 걸쳐 한 사상가의 저작 강독을 이끌어온 학자가 곧 강독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어려워도 몇 년은 함께하기로 했는데 도저히 시간과 몸이 받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한 지방 대학의 HK 연구교수다. 그 대학이 HK 연구 과제에 지원하면서 약속한 논문을 쓰는 것이 일이다. 지난 5월에는 공저이긴 하지만 네 권이나 되는 책을 급조했다고 했다. HK 사업을 3년 더 연장하려 실적 겸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학자적인 자존감이나 소신을 생각할 여지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심사하는 이들의 마음에 들게 보고서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일을 하려고 독일에서 10년이나 그 고생하며 공부했나 싶다”며 “나는 논문을 긁어대는 기계”라고 자조했다.


그런 그가 공동체에서의 강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자신이 학자로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동체는 멍석만 펼치고 있겠다. 이 멍석 위에서 맘껏 춤을 추며 노시라”는 공동체의 원칙과 자신의 바람이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 대학에서 가르치라는 것만 가르치다, 공동체에 와서야 자신이 가르치고 싶은 것을 가르친다고도 했다. 그는 지방에서 서울로 오가는 교통비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공동체 강의를 성심껏 준비하며 진행했다. 머잖아 강의 성과를 모아 학문의 최첨단과 일반 독자를 잇는 책부터 하나 쓰는 것이 그와 공동체의 일차 목표였다. 그런데 현실이 쉽지 않았다. 그에게도 건사해야 할 가족이 있었다. 철학자에게도 밥은 하늘이었다.


그는 자신의 강의를 이어갈 후임을 찾기 위해 독일에서 함께 공부하던 동료 학자 몇몇에게 전화를 걸었다. 학위를 받은 지 10년이 가까워 오는데 번듯한 직장을 가진 이는 별로 없었다. 논문에 쫓기며 여기저기 강의하고 다니느라 하나같이 분투하고 있었다. 옆에서 통화를 지켜보다 그가 전화를 끊으며 상대에게 하는 말에 울컥했다.


“그래, 안 아프고 살아 있어 줘서 참, 고맙다.”


3. 지난 주말, 공동체 참여자들이 작은 잔치를 열었다. 건물 뒤 주차장을 비워 널찍하게 천막을 치고 참여자들이 준비한 음식과 막걸리, 맥주를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홍대 입구에서 활동하는 인디밴드와 국악 연주자 등이 출연하는 조촐한 공연과 월드뮤직 상영도 준비했다. 작은 전시회와 벼룩시장도 열어 잔치 분위기를 돋우었다.


잔치는 지난해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이번 잔치도 기금 마련 성격이 없지 않았지만 첫 잔치는 더 그랬다. 목적이 에어컨을 마련하기 위한 바자회였다. 세미나실을 몇 개 더 만들며 에어컨을 못 들여놓아 쩔쩔매는 것을 본 참여자들이 이 행사를 기획한 것이다. 소문을 들은 이들이 하나 둘 에어컨을 보내와 바자회를 하기도 전에 에어컨은 마련됐다.


첫 잔치를 연 지 1년, 그 사이 공부 모임은 배로 늘고 참여자 또한 그만큼 증가했지만 잔치를 주도한 사람들은 절반 이상 바뀌었다. 바뀐 얼굴은 잔치를 여는 사람뿐이 아니었다. 배우는 이, 가르치는 이의 얼굴도 달라졌다. 규모가 커지면서 새로 온 학자도 많지만 떠난 학자도 생겨난 것이다. 이들이 떠난 이유는 대부분 경제적인 것이다. 여기서의 수입으로 생활이 되지 않는 것이다.


잔치 중 이들 생각에 수시로 울적함이 스쳐갔다. 아, 사람들이 지치는구나. 아무리 공부의 요체가 호학, 즉 학문을 즐기는 데 있다고 하더라도 즐거움과 보람으로만 견디는 게 쉽진 않구나. 잔치가 끝난 뒤 뒤풀이 시간, 잔치를 준비한 이들과 늦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공동체의 지금은 밤, 어쩌면 우린 어두운 밤길을 걷는 중인지도 모르지. 지금 걷고 있는 길이 맞기나 한 것인지, 얼마나 가야 새벽이 올지 몰라 불안해 하며…. 


그렇다면 이 잔치는 즐기는 것 못지않게 내가, 길동무인 너와 함께 걷고 있다는 걸 알리는 행사가 아닐까. 어두운 밤, 힘들어도 나 여기 함께 걷고 있다며 뚜벅, 뚜벅, 사랑과 우정의 발소리를 내주는 것. 누군가 말했지. 밤길 걷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라고.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jrkkk@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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