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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막다른 골목

opinionX 2017. 6. 29. 10:54

대학 새내기 때였다. 문학동아리 모임을 마치고 뒤풀이를 하던 어느 봄밤이었다. 우리는 충무로 극동극장 앞에서 매일경제 쪽으로 걷고 있었다. 지금은 시인이 된 선배가 무랑루즈라는 카페가 있던 골목 어귀에 멈춰서더니 혼잣말이라도 하듯 말했다. 이 골목 끝에서…… 죽었어.

우물 속을 들여다볼 때처럼 아득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 말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나는 이후에도 성균관대 불문과 학생이었던 김귀정 열사가 경찰의 토끼몰이로 죽었다는 그 골목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살아야 했다. 기어오르거나 뛰어넘기에는 조금 어려운 벽이었을 뿐인데 누군가에게는 삶과 죽음이 갈리는 참혹한 벽이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고, 당혹스럽거나 난감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그 골목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떠올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 해 뒤 연세대 법학과 학생이었던 노수석 열사가 죽던 날이었다. 경찰이 국립의료원에 안치된 노수석 열사의 시신을 탈취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을지로 인쇄골목에 갔을 때도 그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비가 억수로 퍼붓던 밤이었다. 하수구에서 빗물이 역류하여 발목까지 잠기던 그 골목들은 여기저기로 이어져 있었건만 나는 마치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국립의료원 앞 을지로를 가득 메운 전경들 위로도, 골목마다 가득 메운 시위대의 머리 위로도 비는 무차별적으로 쏟아졌고, 막다른 골목도 아니었건만, 국립의료원을 지척에 두었건만 거기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한 채 발목까지 잠기던 빗물이 정강이까지 차오르도록 내리는 비를 속절없이 맞으며 젖어갈 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던 바로 그 골목 어느 인쇄소 건물에서 경찰의 곤봉과 군홧발을 맞아가며 조여드는 가슴을 움켜쥐고 나보다 어린 한 학생이 죽어갔던 거였다.

그제야 나는 무랑루즈 골목 어귀에서 선배가 혼잣말처럼 내뱉었던 말에 담긴 진심을 알 수 있었다. 이 골목 끝에서…… 죽었어. 그때 선배는 막다른 골목을 보았던 게 아니라 막다른 골목 앞에 선 스스로를 보았던 것이리라. 그날 이후로 내게 막다른 골목의 이미지는 서로 모순된 두 가지 이미지로만 떠올랐다. 벽에 가로막혀 있어도 막다른 골목이었고, 가로막은 벽이 없어도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리고 지금 9년 동안의 암흑의 시기를 지나 새로운 민주정부가 탄생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나는 여전히 막다른 골목에서 서성거리는 기분이다. 이명박에서 박근혜로 이어지던 세월은 얼마나 참혹했던가. 용산참사가 그러했고 한 노동자가 목을 매달아 죽었던 크레인에 또 다른 노동자가 올라 300여일을 견뎌야 했으며, 해고당한 노동자들은 하나둘씩 자살했고, 세월호 참사로 수백명이 몰살당했으며 농민은 물대포에 맞아죽었다. 국가정보원과 검찰과 같은 권력기관의 협잡과 공작과 폭력은 한결같았으며 재벌과 재벌을 기반으로 한 정당 역시 기승을 부렸다.

이 고통, 이 슬픔, 이 헤어날 수 없는 삶의 진창들, 그 길고 긴 골목을 통과해 이제 겨우 문재인이라는 기착지에 이르렀을 뿐이다. 저 드넓은 도로도 확장된 골목에 지나지 않고 심지어 지평선으로만 구획될 수 있는 광활한 대지라 해도 인간에게는 하나의 골목일 뿐이다.

9년 동안 골목을 헤매다 알게 된 것이 있다면 골목을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는 것이며 그 이유는 삶이 골목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 막다른 골목을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면 그건 어쩌면 등을 돌리고 돌아서서 지금까지 우리를 토끼처럼 몰아대어 이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 넣었던 자들을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민주정부가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사회적 총파업이 예정되어 있다. 가로막은 벽이 없어도 뒤돌아서는 이유는 그이들 역시 매번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 앞에 선 스스로를 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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