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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힘은 막강하다. 누구라도 한번쯤 무심코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잊었던 옛 추억이 한순간에 떠오르는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삶의 한 장면에 각인된 노래는 세월이 지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그 순간을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노래는 일종의 기억장치인 셈이다. 이는 개개인의 경험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의 집단의식에서도 작동한다.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경험했던 이들에게 그때의 기억은 함께 불렀던 노래들을 통해 순식간에 재생된다. 지난 주말 6·10 민주항쟁 30주년 기념식에서 ‘그날이 오면’ ‘벗이여 해방이 온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광야에서’ 같은 당시 곡들이 기악 연주로 혹은 노래로 울려 퍼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이 곡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기념하는 가장 강력한 매개일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예술가들은 그림으로, 노래로, 연극으로, 춤으로 군부독재 정권에 저항했다. 이때 만들어진 수많은 ‘민중가요’는 엄혹했던 시절 젊은이들의 분노와 슬픔을 대변하고 저항의식을 고취시키며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만들었다. 1980년대 활발하게 전개된 노래운동의 물꼬를 튼 것은 1970년대 김민기의 작업이었다. 유신정권하에서 금지곡이었던 ‘아침이슬’과 ‘상록수’는 저항가요의 상징이었고, 1978년 나온 노래굿 ‘공장의 불빛’ 비합법 테이프는 이후 노래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그 후 노래모임 ‘새벽’ ‘노래를 찾는 사람들’, 고 김광석, 안치환, 윤선애, 꽃다지 등 많은 이들이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널리 유포된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

노래로 불의한 세상에 맞서는 것은 우리만의 일이 아니었다. 1960~1970년대 전 세계적인 저항의 물결 속에서 반전·평화 운동에 앞장선 미국 포크 가수들, 그리스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던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라틴아메리카 ‘누에바 칸시온(새로운 노래)’ 운동 등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음악가들이 부당한 억압과 인권 유린, 불평등한 사회의 모순을 노래했다. 특히 1973년 군부쿠데타 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칠레의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으로 망명길에 오른 국민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의 노래는 독재정권하에서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한국의 청년들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을 기리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 오늘날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것처럼.

참혹한 역사의 현장은 음악에 담겨 후세에 전해지기도 한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계 작곡가 아널드 쇤베르크는 망명지에서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접하고 ‘바르샤바의 생존자’를 썼다. 사회 현실과 거리를 두고 철저하게 음악 작품의 내적 세계에 몰두했던 이 작곡가조차 인류 최대의 비극을 지나치긴 어려웠던 것이다. 날카로운 불협화음이 난무하는 가운데 내레이터가 가스실로 향하는 그날의 상황을 설명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찬 히브리어 합창으로 끝나는 이 곡은 전쟁의 공포와 대학살의 악몽을 소리로 재현한다. 

윤이상의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역시 고국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의 광경을 목도한 작곡가의 피맺힌 절규였다. 미국 작곡가 프레데릭 제프스키는 칠레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 ‘단결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를 주제로 한 36개의 변주곡을 써서 그에 대한 강한 연대감을 표했다. 앞의 두 곡과 달리 아방가르드에서 블루스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어법이 한데 어우러지고, 이탈리아 민중가요 ‘반디에라 로사’와 브레히트-아이슬러의 ‘연대가’도 곳곳에 출몰한다. 이 장대한 변주곡은 저항과 연대의 정신이 요구되는 시대에는 어김없이 소환되었다. 지난 촛불집회의 과정에서도.

1980년 광주와 6월 민주항쟁을 겪은 세대에게 그 시절은 30년 전 불렀던 노래들과 함께 기억된다. 세월호 참사와 촛불혁명을 경험한 지금의 젊은 세대는 훗날 이 시기를 어떤 노래들로 기억하게 될까? 이 시대는 음악가들에게 어떤 흔적을 남겨놓았을까? 음악역사가는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도 궁금하다.

이희경 음악학자·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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