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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내려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꽤나 어려워했던 것 하나가 말을 알아듣는 일이었다. 아버지 고향이 경상남도여서 어지간한 말은 알아들을 성싶었는데, 이야기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몇 번이나 되묻다가, 약간 과장된 몸짓을 하면서 알아들은 척을 했던 적이 종종 있었다. 십 년이 지났으니 그래도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처음 듣는 낱말이 적지 않다.

살림을 꾸리느라 가장 매달리는 일은 여전히 책을 내고 원고를 편집하는 일이다. 일할 때에 늘 곁에 두는 것은 국어사전. 그 가운데에서도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이다. 두꺼운 사전을 펼쳐서 하나씩 낱말을 찾아보던 것은 오래전 일이고, 이제는 늘 인터넷 검색을 해서 말을 찾는다. 이렇게 사전을 뒤지고 있으면 늘 마음이 어지럽다. 화가 나고, 어이가 없을 때가 많다. 아마도 편집자로 일을 하거나, 교정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라고 믿는다.

사전은 말을 글로 옮기는 데에 기본이 되는 책이다. 글을 읽고 그것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때에도 마찬가지. 나라에서 펴내는 사전이라고 하면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편집 일을 하고 교정을 볼 때 모든 기준은 국립국어원 사전을 기준으로 한다. 하지만 그것을 꼼꼼하게 따르다 보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기 쉽다. 최근에 기억나는 말 하나는 ‘몸뻬’이다. 시골에서 흔히 입는 바지인 ‘몸뻬’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 퍼졌다고 하는데, 사전에는 ‘왜바지, 일 바지’로 순화하라고 풀이해 놓았다. 다만, ‘왜바지’라는 말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지 않다. 순화어를 찾아도 나오지 않는다. 시골에서 듣게 되는 새로운 말들은 대개 ‘방언’이거나 무슨 말의 ‘잘못’인 경우일 때가 많다. 사전을 만드는 사람이 잘 모르거나 잘 쓰지 않았던 ‘다른’ 말들이 숱한 경우에 ‘틀린’ 말이 된다. 국립 기관에서 펴낸 원칙을 세우는 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잘못이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긍하기 어려운 것은, 이 사전을 찾아보기에 가장 좋은 인터넷 홈페이지는 네이버라는 것이다. 더 이상 표준국어대사전은 책으로 나오지 않는다. 판올림은 인터넷을 통해서만 하고 있는데, 국립국어원과 네이버 두 곳에서 이 사전을 본다. 물론 네이버를 통해서 찾는 것이 훨씬 편하다. 여러 자료를 함께 보기에도 그렇고, 판올림된 자료를 정확하게 보기에도 좋다. 그런데 어째서 다른 기업에서는 이 사전을 쓸 수 없는 것일까. 국립국어원은 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일개 기업에 떠넘기고 있을까.

처음 출판사에서 일을 배울 때,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반드시 교과서를 기준으로 했다. 그것은 글을 처음 익히는 아이들이 헷갈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나 제 것이 맞다고 우기기 시작하고, 그래서 서로 다른 질서로 쓰여진 책을 읽게 된다면, 책 읽고 글 쓰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나중에는 으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지. 가장 큰 문제는 국립국어원 혼자서도 앞뒤가 맞지 않고, 남을 함부로 업신여기는 식으로 일을 해 왔다는 것이다. 그게 고스란히 사전에 담겨 있다.   

그래서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을 들추며 말을 익히는 아이들이라면 이런 것들을 배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과 저기서 말하는 것이 달라도, 남이 눈치채지 못하거나, 누가 크게 문제 삼지 않으면 괜찮다는 것. 지역에서 서로 다른 말을 쓰는 사람에게 너는 ‘잘못’이라고 낙인찍고 무시해도 괜찮다는 것. 자기 일을 스스로 아퀴 짓지 않고 남에게 떠넘긴다고 해서 별 문제는 아니라는 것. 자기가 해 놓은 일이 남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남을 곤란하게 한다 해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아이들이 숙제를 할 때마다 네이버를 통해 국립국어원의 사전을 보고 있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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