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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세계인권선언 제1조)

지금으로부터 69년 전, 1948년 12월10일 프랑스 파리의 샤이요궁(Palais de Chaillot)에 모인 각 나라의 대표들은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발생한 희생과 전 세계에 만연한 인권침해에 대해 반성하고,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할 존엄과 권리의 최소한을 선언했다. ‘세계인권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2년 뒤인 1950년에 열린 제5차 유엔총회에서 매년 12월10일을 세계인권선언 선포일로 기념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고,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각국에서는 이날을 ‘세계인권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짧은 전문과 30개 조항의 본문으로 이루어진 ‘세계인권선언’은 꼭 한번쯤 읽어볼 만한 글이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414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유엔총회 문서 중에 가장 많이 번역된 문서이기도 하지만, 그 내용도 70년 전이라는 긴 시간이 부끄러울 만큼 2017년 한국에서 여전히 생명력이 있다.

지난 8일 한국에서도 세계인권선언 69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기념식에 참석한 이낙연 국무총리는 축사에서 “인류 역사는 인권 신장의 역사”로 규정하면서, 인권 신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두 개의 사건으로 18세기 시민혁명과 20세기의 세계인권선언을 꼽았다. 특히, 세계인권선언은 강제력을 갖지 못한 선언이지만, “역사에서는 선언 이상의 강력한 기여를 해왔”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인권을 우선하는 민주주의 강화’를 위해서 인권 사각지대와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겠다고 약속했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과제들 중 단 하나만 꼽아야 한다면, 나는 보편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이라고 생각한다. 차별금지법은 세계인권선언에서 선언한 ‘존엄한 인간’과 우리 헌법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평등’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생활영역에서 합리적 이유가 없는 차별을 금지·예방하고 불합리한 차별로 인한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법이다. 독일의 평등대우에 관한 법률, 캐나다의 인권법, 미국의 민권법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일반적 차별금지법이 이미 시행되고 있고 고령자에 대해서 고용영역에서의 차별을 금지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체류 외국인의 숫자가 200만을 넘어섰고, 성(性)소수자에 대한 국제적 인권 수준이 개선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 영역과 제한된 분야를 넘어서 모든 생활영역에서 인간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금지하고자 하는 것이 보편적 차별금지법 제정의 가장 큰 필요성이다.

국제인권기구의 권고도 매년 반복되고 있다. 2014년 방한했던 무투마 루티에레 유엔 인종차별 특별보고관은 개인 간에 발생하는 인종주의, 외국인 혐오 등을 방지하기 위해 한국 정부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했고, 2017년 유엔 사회권규약위원회도 2009년에 이어 거듭 인종·장애·종교·성적 지향·학력 등이 포함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다. 지난달 있었던 한국의 국가별인권상황정기검토(UPR) 제3차 심의에서도 미국, 캐나다 등 여러 나라가 한국 정부에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한국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과 감각적 오독(誤讀)이 심각하다. 동성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개선하면 동성애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는 성(性)적 정체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전제할 뿐 아니라,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해서 부당한 차별과 혐오를 통해서라도 그 존재의 발현을 막아야 한다는 빈약한 인권 수준을 보여준다.

69년 전, 우리가 선언한 어떤 권리와 자유도 다른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해치기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지혜로움으로 세계인권선언의 마지막 조항을 끝맺었던 선배들의 통찰을 세계인권의 날을 기념해 곱씹어볼 일이다.

<조영관 | 이주민센터 친구 사무국장·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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