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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도입된 피망, 양상추, 브로콜리 같은 서양 채소를 양채라 한다. 그중 양배추는 사철 밥상, 특히 식당에서도 중요한 몫을 해내고 한국 농업에서도 큰 몫을 차지한다. 겨울 양배추 주산지인 제주도에서는 양배추를 ‘국민 채소’라 부를 정도다. 아직도 치킨집에 가면 채친 양배추에 마요네즈와 케첩을 반반 섞어 뿌려준다. 1970년대생인 내가 ‘사라다’라 불렀던 샐러드의 원형이 바로 양배추 샐러드다.

제주도산 겨울 양배추의 본격 출하를 앞두고 지난 11일 박원순 서울시장과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양배추 회담’을 열었다. 이유는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가 가락시장에서 거래되는 양배추를 올해 9월부터 ‘하차경매’ 의무화 대상으로 통보했기 때문이다. 하차경매란 농산물을 트럭에서 내려 팰릿 위에 쌓아 경매에 부치는 것이다. 트럭에 싣고 온 그대로 경매가 이뤄지던 차상거래 품목이었던 무, 양파, 총각무는 작년부터 하차거래가 강행됐다. 서울시는 올해부터는 양배추 외에 대파·쪽파도 반드시 하차거래로 전환하겠다고 통보했다. 명분은 물류의 효율과 투명성, 가락시장 현대화다. 일명 ‘속박이’라 하여 트럭에 상차된 농산물 중 하품들이 섞여 있는 문제와 흙날림 현상을 개선한다는 이유도 댔다.

하차거래의 경우 산지에서 출하자들이 박스나 망에 농산물을 넣고 래핑까지 해서 규격에 맞춰 서울로 보내야 한다. 래핑기나 팰릿 작업에 투입되어야 할 기구와 인력이 더 늘어나 물류비가 증가하지만 찔끔 주어지는 물류지원비로는 생산비를 벌충할 수가 없다. 그나마 한시적 지원이다. 무엇보다 하차거래를 통보받은 위의 채소들은 박스에 넣거나 래핑을 하면 짓물러 선도가 떨어지고 박스가 물에 젖는 등 고충이 많다. 그래서 산지에서 산물출하(비포장 출하)를 해왔던 것이다.  

제주도의 월동무나 양배추는 기초 포장을 한 뒤 트럭에 실어 보낸 다음 컨테이너 적재를 해서 배를 타고 육지로 올라온다. 하지만 가락동에서 하차거래를 하면 밭에서부터 박스 작업이나 래핑을 해 팰릿에 실어 작업이 가중된다. 이는 결국 물류비 상승으로 이어져 생산자의 몫이 더욱 줄어들게 된다. 이에 원희룡 지사가 박원순 시장과 만나 양배추 하차거래 조치를 유예시켜달라고 요청했다. 난항 끝에 내년 4월까지 고령농과 영세농의 경우 기존 방식대로 하고 대형농가는 하차거래를 시행한다는 합의가 겨우 이루어졌다. 그런데 고령농과 영세농의 기준이 없다. 적은 규모의 양배추 농사를 지어도 작목반에 속해 농협에 계통 출하를 하기 때문에 영세농을 특정할 수 없다. 포전거래(밭떼기거래)의 경우 작업비 상승을 이유로 처음부터 거래 가격을 후려칠 게 빤하다는 것이 양배추 농가들의 우려다. 제주도에서 양배추와 쪽파 농사를 짓는 한 여성 농민은 하차거래 강행을 두고 “생산자만 쥐어짜는 겁니다. 양배추 값이 떨어질 때는 출하비도 못 건질 것이 뻔해요. 매집상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고요”라고 일갈했다.

하긴 차상거래니 하차거래니 처음 들어보았다는 이들도 많다. 도시 사람들은 양배추 때깔은 좋은지 값은 싼지에 대해 관심이 있겠지만 양배추가 트럭에서 내려오든 아니든 굳이 알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농산물 유통개혁은 꼭 필요하지만 그 개혁의 방향이 생산자들의 복지 향상과 연결되는 것이 도시 소비자 마음에도 좋지 않겠는가. 올해 그토록 덥고 가물었는데도 제주 양배추가 퍽 실하고 달다. 생산자 속내는 푹푹 썩고 있건만.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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