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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카소네 히로후미(中曾根弘文) 전 외무상이 지난 22일 한국에 대해 “국가의 몸(형태)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망언이자 망발이다. 한국 정부의 화해·치유재단 해산 결정에 대한 반발이다. 그가 자민당의 ‘일본의 명예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특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어도 그렇다.

이 발언의 당사자인 나카소네 히로후미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의 아들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세 번이나 총리를 지냈는데 상황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지조 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정치 노선이 바뀌어서 ‘풍향계’란 멸시의 의미가 담긴 별명을 얻었다.

게다가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1989년 리쿠르트 스캔들에 연루되어 한때 자민당을 탈당해야만 했던 부패의 당사자다. 리쿠르트 스캔들이란 리쿠르트사가 각종 사업 청탁을 위해 회사의 미공개 주식을 정치권과 관가 실력자들에게 싼값에 제공하고 이들은 리쿠르트사의 각종 사업에 이권을 준 사건이다. 이런 부정부패 당사자가 버젓이 정계에 복귀하고, 은퇴 후에는 자신의 지역구인 군마현을 아들에게 물려줘 세습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이의 아들이 어디 다른 나라에 대해 국가의 격을 운운하는 발언을 함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1983년 미국을 방문해 당시 레이건 대통령과 회담할 때는 ‘불침항모(不沈航母)’란 조어(造語)를 만들어냈다. 러시아의 군사력으로부터 방위하기 위해서 일본 열도 전체를 미국 군대가 사용할 수 있도록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제공하겠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러시아의 군사적 억지력을 위해 기꺼이 일본 열도를 바치겠다는, 미국에 대한 충성의 다짐이다. 민족적 자존심이 있다면, 한 나라를 대표하는 총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굴신(屈身)의 처세이자 비굴함이다. 이런 태도의 정치인에게 세 번씩이나 총리를 시켜준 일본이야말로 ‘국가의 몸을 갖추고 있지 못한’ 미성숙 집단 아닌가!

강대국에 대해 몸을 낮추고 굽신거리는 일본 정치인들의 태도는 그들이 제일로 추앙하고 있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가르침에서 배운 처세술이기도 하다. 일본과 미·러시아와의 화친통상조약이 체결된 후인 1855년 쇼인은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처럼 강조하고 있다.

“러시아, 미국과 강화가 일단 정해지면 우리 쪽에서 이를 어겨 신의를 오랑캐에게 잃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장정(章程·규정)을 엄격히 하고 신의를 두텁게 하여 그 사이 국력을 배양하여 취하기 쉬운 조선·만주·인도차이나를 취함으로써 교역에서 러시아와 미국에 잃은 바를 토지로써 조선과 만주에서 보상받아야 한다.”

미국이나 러시아에는 비굴한 저자세로 일관하여 교역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이를 감내하면서 신의를 잃지 않도록 하고, 대신 그쪽에서 얻은 피해는 조선과 만주를 정복하여 영토로 보상받는다는 것이니 황당무계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더욱 어이없는 것은 이런 논리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실력자 정치인 대다수가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대 총리를 지낸 이토 히로부미는 말할 것도 없다. 지금의 아베 신조 총리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제일로 존경하는 사람이 요시다 쇼인이어서, 총리가 되자마자 처음으로 한 행동이 쇼인의 묘소를 참배한 일이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50여 년간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일관되게 전후정치 총결산을 내걸고 평화헌법 개정 등 일본의 우경화를 앞장서 주창해 왔다. 또한 1985년 8월15일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했다. 지금 걸핏하면 총리를 비롯한 내각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짓의 물꼬를 튼 당사자가 야스히로인 것이니, 히로후미의 발언 역시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일본 보수 정치인들은 힘센 놈에게 비굴하게 몸을 굽히면서 그 모욕감을 이웃 사람들에게 대신 풀려고 하는 전형적인 ‘저열아 집단’이요, 여전히 군국주의 망령이 조종하는 집단 최면에 사로잡혀 있는 환자들이다. 그들이 조종하는 일본이야말로 ‘불가역적으로’ 미성숙 국가인 것이다.

<조용준 | 작가·<메이지 유신이 조선에게 묻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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