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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사탕을 수줍게 내밀자, 순임(문소리)에게 영호(설경구)가 박하사탕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좋아하려고 노력해요. 저 공장에서 그거 하루에 천개씩 싸거든요”라고 대답한다. 영화 <박하사탕>의 한 장면이다. 군입대를 한 영호에게 순임은 박하사탕 한 개씩 편지봉투에 담아 편지를 쓰곤 했고, 영호가 5월 광주의 계엄군으로 차출되던 날 군홧발에 박하사탕은 짓이겨진다. “나 돌아갈래”로 절규했던 영호의 순수는 그때 파괴된다.

1970년대 영등포와 구로 일대의 수많은 ‘순임이’들은 캔디부, 껌부, 비스켓부, 카라멜부, 초콜릿부에 배속되어 하루 12시간 넘게 사탕을 1000개씩 쌌다. 작업량만큼 임금을 받는 도급제로 노동자들끼리 경쟁 상태에 몰아넣었다. 사탕을 싸면 손의 지문이 닳고 피가 났지만 반창고를 붙이면서 일을 했다. 그렇게 열두 시간을 일해서 번 돈은 150원.

<공장과 신화>라는 책에서 롯데제과에서 민주노조 운동을 하다 해직된 김순옥씨와 그의 동료들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손가락이 휘어있다고 구술한다. 당시 가장 큰 제과기업인 롯데제과와 해태제과, 농심, 동양제과, 삼립식품, 크라운제과는 당연한 듯 12시간 노동제를 유지했다. 해태제과와 롯데제과의 여공들은 8시간 노동시간을 쟁취하기 위해 온갖 폭력과 모욕을 당했다. 그렇게 처절하게 달성한 노동시간이 제과업계 8시간 노동제다.

순임이 영호에게 보낸 박하사탕 한 알은 그녀가 ‘검신’이라는 신체검사를 따돌리고 보낸 사탕이었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사탕이나 과자를 들고 나가는 잠재적 도둑 취급을 당하면서 퇴근길 줄을 서서 ‘검신’을 받았다. 오죽하면 제발 검신은 하더라도 남자 검신원이 아닌 여자 검신원을 배치해달라는 요구까지 했을까. 사탕과 초콜릿은 달콤했지만 달콤함을 만들어낸 노동의 처지만큼은 비리고 짰다. 어릴 때 내가 먹은 사탕에 피와 땀이 묻어있었던 것이다.

볼썽사나운 집안싸움을 뉴스에서 보는 일이 잦아졌다. 롯데그룹의 신격호 총괄회장의 진의를 두고 두 아들이 진창 싸움을 벌이고, 삼성의 부회장은 구치소에 갇혀있다. 재벌이 입길에 오르는 일은 대체로 뇌물과 배임 혐의, 2·3세대에 대한 불법 승계와 세금 포탈, 일감 몰아주기와 종종 폭력사태까지. 이 모든 행위를 한 마디로 수렴하면 ‘갑질’이다. 저지른 경제 범죄가 스케일이 커서 영화 대사처럼 그들은 ‘사기꾼’이 아니라 ‘경제사범’이고 그들이 벌이면 ‘왕자의 난’이 된다.

언제까지 외국인들이 와서 덕수궁만 봐야겠느냐며 ‘기업보국’의 마음으로 신격호 회장은 123층짜리 제2롯데월드를 쌓으라 했다. 그 탑을 쌓는 동안에도 여럿 다치고 죽었다.

하지만 저 높은 첨탑이 짠물 경영의 귀재, 애국심 투철한 신격호 일가만의 업적은 아닐 것이다. 들장미 소녀 캔디 또래의 ‘순임이’들이 외로워도 슬퍼도, 손가락에 피톨이 튀면서, 철야에 졸았다며 따귀를 맞아가면서 쌓아 올린 피의 과자탑이고 캔디탑이다.

노사정 합의에 따라 최저임금 7530원으로 결정되었다. 여기저기 앓는 소리가 들려온다. 고용을 줄이겠다는 겁박도 들려온다. 이 와중에 나는 7530원으로 과자와 아이스크림 몇 개를 사 먹을 수 있는지 계산하느라 소요 중이다. 롯데 ‘몽쉘통통’ 12개들이 한 박스와 칠성사이다 큰 병 하나를 사 먹을 수 있겠구나. 아이스크림 하나 더 사 먹을 수 있는 날은 언제쯤 오려나.

정은정 |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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