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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합니다!”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군 적이 딱히 없던 것 같은데 학기말만 되면 누군가에게 모진 사람이 되곤 한다. 학기말 성적이 공시되면 억울함을 호소하는 학생들을 달래야 할 일이 생긴다. 자신은 결석도 한 적 없고, 과제도 제날짜에 냈고, 시험도 열심히 치렀는데 왜 성적이 이것밖에 나오지 않는지에 대한 억울함이다. 미안하기 짝이 없어서 쭈뼛거리며 답신을 보낸다. 당신의 최선을 알고 있노라. 분명 당신은 A학점을 받고도 남을 만하지만, 난들 어쩌랴. 이 모든 것이 상대평가 때문이라며 제도 탓을 한 뒤에 숨는다. 상대평가란 일종의 줄 세우기다. 평가 대상자가 아무리 노력했다 하더라도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다면 후순위로 밀려나는 평가 방법이다. 문제는 평가 대상자는 자신의 노력이 어느 정도의 선에 위치해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질 때 지더라도 내가 왜 졌는지는 알고 싶어도 왜인지는 평가자만이 안다. 그래서 마지막엔 어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차안대를 한 경주마처럼 일단 앞만 보고 달려본다. 너도나도 노력을 경주하니 대체로 한 집단의 능력이 평균적으로 올라가고 그만큼 사회의 능력 총량도 늘어나지 않겠느냐는 순진한 계산도 깔려 있다. 상대평가의 비겁한 변명이다.
며칠 전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는 재벌로 등극한 하림그룹 김홍국 회장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불러들였다. 추궁받은 사안은 살처분 보상금 선취 의혹(병아리와 사료의 소유주가 본사이기 때문에 보상금을 농가와 나눈다), 불평등한 농가 계약 문제, 그리고 상대평가 방식의 사육평가 방식이다. 김홍국 회장은 국정감사의 단골손님이다. 그래서인지 맷집이 점점 더 세어진다. “불평등하다는 사례가 나오면 책임지겠다” “상대평가는 농가를 위한 제도다. 오히려 본사가 더 손해다”라며 큰소리를 치고 국감장을 여유롭게 떠났다.
가축들이 생명이 아닌 공장 제품 찍듯이 대량 생산된다 하여 ‘공장식 축산’이란 말을 요즘 많이 쓴다. 현재 닭과 오리의 기업계열화 비율은 94%에 이른다. 기업과 계약을 맺은 농가가 병아리와 사료를 받아 닭으로 길러낸 뒤 수수료를 받는 방식이다. 계약 농가는 한 달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닭을 길러내고 본사의 평가를 받는다. 누가 사료를 더 적게 먹이고 잘 길렀는지를 따져 성적을 매기는데 이를 사료요구율이라 부른다. 문제는 평가방식이 상대평가라는 점이다. 농가는 병아리와 사료를 갖다 주는 대로 열심히 사육하지만 막상 수수료를 정산받을 때는 갸우뚱하다. 잘 길렀다 여겼는데 당신보다 더 잘 기른 계약농가가 있으니, 당신이 받을 수수료는 이 정도라고 통보받는 셈이다. 농가는 다른 농가의 사육성적을 확인할 길도 없고 의구심만 키울 뿐이다. 어떤 농가는 본사와 사이가 좋아 더 좋은 병아리를 받았다더라, 나한테 온 병아리는 처음부터 비실비실해서 많이 죽어나갔다는 원망이 터져 나오곤 한다. 그러나 비밀은 평가자인 본사만이 안다. 표면적으로야 갑과 을이 아닌 계열주체와 사육주체 간의 자유로운 계약관계지만 현실에서는 철저한 갑을, 아니 갑병 정도의 관계다. 사육주체인 농가는 본사에 목매달아야 하는 이유가 너무나 많다. 대출받아 시설은 만들어 놓았는데 병아리와 사료가 제때 들어오지 않으면 개점휴업 상태가 되어 손해가 난다. 병아리 못 받았다고 은행이 사정 봐주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작업등 켜진 공장의 미싱은 돌고 돌아야만 한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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