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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기억에 엄마는 자주 아팠다. 목이 아프다, 위장이 아프다, 깁스를 하고서 한여름에 쩔쩔매기도 하고…. 그래도 큰병이 없으니 다행이다 싶어 엄마가 아파 죽겠다고 할 때면 딸은 ‘골골팔십’이라는 야멸찬 멘트를 날렸고 그 말이 뭔 위로가 된다고 엄마는 좋아 웃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엄마는 아픈 내색을 별달리 안 하게 되었다. 일전에 안과치료 받은 것도 한참이 지나서야 동생과 얘기하다 우연히 알게 되었다. “언니 바쁜데 걱정한다고 얘기하지 말랬어.” 공들여 키운 의사 딸 참 소용없구나. 지난주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별일 없지? 김서방은? 바빠도 밥 잘 챙겨먹고 다녀라.” 언제나 토씨 하나 안 틀리는 레퍼토리다. 그냥 안부전화인가 했더니 뜻밖의 이야기를 하신다. “근데 말이지, ○○세포 그게 뭐냐? 네 어미가 어서 듣고 왔는지 그거 잘한다는 병원엘 간다하네. TV에 나왔다나…. 그거 사기 아이가?” 아빠의 억양이 한 옥타브 올라간다. 마음이 저려왔다. 엄마가 많이 아팠구나. 오죽했으면….

아픈 사람은 귀가 얇아진다. 무슨 얘기라도 들으면 금세 솔깃한다. 굿을 했다거나, 고양이를 삶아 먹었다거나 이런 얘기에 일반사람들은 까르르 웃지만 아픈 사람들에겐 달리 들린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아픈 사람은 실낱같은 희망을 덥석 잡는다. 현대의료에는 분명 현혹하는 요소가 곳곳에 촘촘히 담겨 있다. 치료시기를 놓쳐서 안타까운 경우도 있지만, 치료를 너무 앞서가서 고생하고 후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검증이 덜 된 신기술의 문제점과 과잉진료에 대한 뉴스는 이제 새롭지도 않다. 의료계 내부에서도 자성과 경계의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필자가 쓴 <의사는 수술 받지 않는다>라는 책에서뿐 아니라, 해외의 여러 석학들도 같은 맥락의 의견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앤디 카 교수는 상당수 수술의 효과가 가짜약 효과(placebo effect)와 같은데도 관행처럼 이뤄지는 것을 비판하였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학의 이안 해리스 교수도 과학적 증거가 부족한 수술들이 여전히 표준의료지침에서 권장되고 있는 것을 지적하였다.

최근 정부는 ‘비급여의 전면급여화’ 정책을 새로 추진하고 있다. 병원비가 줄어든다니 얼마나 좋은가! 어쩌면 줄기세포도 로봇수술도 돈걱정 없이 받을 수 있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응원소리가 높은 만큼 다른 한편에서는 우려가 깊은 것도 사실이다.

첫째, 집행부가 주장하는 ‘진입은 쉽게, 퇴출구조는 강하게’라는 모토가 실제 잘 작동할까? 이제까지의 학습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일례로 2011년 1년간 한시적으로 확대되었던 골다공증 치료제 급여기준은 기한이 다가오자 진료일선에 대혼란을 일으켰다. 환자들은 계속해서 보험가로 처방해달라고 아우성이었고 의사들도 불만을 쏟아냈다. 결국 정부는 뒷걸음쳤고 13개 유관학회들의 개선안을 받아들여 한시조건을 삭제하게 된다. 전진은 쉬워도 후퇴는 어려운 법이다. 자칫 안전성, 유효성, 비용효과성에 대한 성급한 검증이 섣부른 진입을 허하게 되고 이들 항목에 대해 ‘나라에서 허가해주었다’는 어설픈 면죄부를 발행하는 것이 되진 않을지 염려된다.

둘째, 보장률 70% 달성이라는 숫자에 급급한 나머지 본질적 목표인 국민건강은 뒷전으로 밀리는 것은 아닐까? 검증이 덜 된 신기술을 성급히 급여항목에 넣다보면, 국민이 마루타가 되든지 말든지 비용만 보전해주면 된다는 식의 위험한 접근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의료사용량이 순식간에 증가하고 특히 대형병원으로의 쏠림현상이 심화될 터인데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던 의료전달체계가 이참에 붕괴될지 모른다. 정책이 변한다는 것은 의료환경이 변한다는 것이고 이는 분명 환자 개개인의 의료이용 행태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이 점이 과소평가되지 않았는지…. 진료횟수제한을 걸어 강제할 수 있다는 발상은 놀랍다. 왜곡된 억압은 상상 이상의 역효과를 부른다. 아픈 사람들은 절박한 만큼 비이성적으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만큼.

셋째는 역시 재정 문제다. 30조원 투입으로 가능할까? 기하급수적 의료비 증가가 예상되는데 이는 장차 건보재정의 근간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이 모든 우려가 그저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현장에서 볼 때는 현실성 높은 사안들이다. 집행부에서는 다각도의 변수를 보다 면밀히 검토하며 추진해야 할 것이다.

예약을 깰 수 없다며 엄마는 기어이 그 병원에 다녀오셨고 수술날짜 잡으라는 얘기를 들었다. 오! 제발…. 딸은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아빠한테 카톡 답장이 왔다. “염려 마라. ○○인지 뭔지 그 수술 안 받기로 했다.”

<김현정 | 서울특별시동부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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