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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친구 모임에서는 꼭 ‘농활’ 이야기가 나오곤 한다. 풋풋했던 시절의 가장 끈끈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어서다. 방학을 맞으면 품삯이라도 벌충하길 바라던 부모님 뜻을 거스르고 굳이 농활을 가서 남의 밭을 매곤 했다. 덕분에 영호남 두루 다녀보았고 이는 공부의 자산이 되었다. 도시내기 친구들도 텔레비전에서 농활 지역 이야기가 나오면 눈길이 간다고 말한다. 정서적 연고가 생긴 셈이다. 

도시민 10명 중 3명은 은퇴 후 농촌에 내려가서 살 의향이 있다 하지만 막상 돌아가고 싶은 농촌은 소멸 위기다. 농어촌 지역의 43% 정도가 소멸위험 지역으로 분류될 정도고, 지방재정은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곳도 많다. 이런 도농 간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고, 농어촌 생존에 어느 정도 숨통을 틔울 방법으로 고안된 제도가 ‘고향세’다. 이는 수도권 주민들이 일정 금액을 농어촌 지자체에 기부하고, 세금 공제를 받는 제도다. 이에 대한 답례로 지자체는 지역의 특산물로 기부자에게 답례품을 제공할 수도 있다. 

‘고향세’는 2008년 일본에서 먼저 도입되었다. 농어촌 과소화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현상이고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최근 고향세 납부의 과열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답례품 경쟁이 과열되면서 제도적 보완에 들어갈 정도로 고향세는 인기다. 한국은 2008년 당시 문국현 대선후보가 공약으로 내걸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이기도 하다.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되어 있다. 고향세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60% 정도의 찬성률을 보이고 있다. 다만 정치권의 이해득실이 남았다. 여야를 막론하고 농어촌 기반의 국회의원들은 빠른 도입을 촉구하고 있지만, 대도시 국회의원들은 세수가 유출될까 봐 소극적이거나 반대 입장이다. 결국 아직까지도 고향세 도입 논의는 표류 중이다. 

고향세가 도입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고향에 기부하겠다. 도시 태생의 시민들은 여행을 가서 위로를 받은 지역에 할 수도 있고, 대학 시절 다녀온 농활의 추억을 떠올리며 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아직까지 고향세 도입에 대한 신뢰가 충분하지 않다. 홍보 부족과 집행의 투명성 미비 때문이다. 따라서 농어촌 주민들의 실질적인 복지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용처가 분명히 정해져야 한다. 지역마다 사정이 다르니 답례품의 형평성도 맞출 필요가 있다. 어찌 됐든 제도적 장치만 섬세하게 마련된다면 좋은 제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근래 지방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긍정적이었던 마음이 차갑게 식는다. 예천군의원들 해외연수 추태와 자리 보존을 하는 뻔뻔함을 보자면 말이다. 예천군 농산물 불매 움직임까지 나왔을 정도로 시민들의 분노가 크다. 사과로 유명한 예천군은 이번 설날 대목장 주문이 급감해 생산자들이 타격을 받았다. 지방의원들이 지역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킨 것이다. 급한 마음에 예천군수가 농산물 구입을 호소하고 나선 상황이다. 이는 전형적인 ‘오너리스크’다. 외식 프랜차이즈 오너들의 갑질과 추태에 결국 등 터지는 것은 가맹점주들인 것처럼 예천군민들 등만 터져나갔다.

‘고향사랑기부제’든 ‘고향세’든 세금이 움직이는 일이고, 세금 배치는 정치의 문제다. 그런데 농촌에 숨통이 트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정 기부한 돈이 저 정도 수준의 정치인들의 손에 놀아날까 봐 망설여진다. 예천의 사과는 달고 맛있다. 사과는 죄가 없다. 다만 사람이 죄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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