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새해 들어 결심한 것 중 하나는 기타를 배우자는 것이었다. 그냥 기타가 아니라 클래식 기타. 평생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 없다는 게 말이 안되는 것 같았고, 그중 기타가 만만해 보였다. 지금 중장년인 세대에게 ‘청바지에 통기타’는 젊은 시절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어서 나도 간단한 포크송 정도는 뚱땅거린 경험이 있다. 하지만 동네 형이나 누나에게 배운 기타는 한계가 뻔해서 도무지 실력이 늘지 않았고, 기본 코드로 칠 수 있는 곡 몇 개를 배운 다음에는 곧 시들해져서 관두고 말았다.

기타를 새로 배우기로 결심했으니 장비 일습부터 갖추어야 했다. 무릇 프로의 시작은 장비 아니던가. 기타 학원의 원장이 나를 보더니 “장비로는 당장 무대에 올라도 되겠어요”라며 놀려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리를 해서 장비를 갖춰놓으면 들인 비용이 아까워서라도 결심이 오래간다는 게 우리들의 지론이다. 자전거 속도가 안 나는 건 싸구려 자전거 탓이고, 요리를 못하는 건 삼중바닥 다이아몬드 코팅 프라이팬이 없기 때문이니까.

출판계 선배가 오래 다닌 학원이어서 믿음직했고 곧 친한 번역가가 합세했다. 그렇게 일산 탄현동의 작은 교습소에 모인 우리는 겨우 2주를 보낸 후 합주단을 조직하기로 했다. 숯고개라는 뜻의 탄현(炭峴)을 슬쩍 바꾸어 현악기를 타는 탄현(彈絃) 트리오로 이름 붙이자고 침을 튀며 떠들어댔다. 원장 얼굴에는 이런 ‘아재들’이 자꾸 몰려와서 학원물을 흐릴까 걱정하는 빛이 역력했지만.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연습에 너무 열중하다가 급기야 입술까지 터졌다. 클래식 악기를 배워본 사람은 다들 알겠지만, 이 취미는 몰입의 강도가 대단하다. 악보와 운지에 온 신경을 쏟다보면 아무런 잡념이 안 들고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연습을 마치고 나면 온몸이 기진맥진할 정도다. 프란시스코 타레가의 연습곡을 치고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화 주제곡 하나를 끝내고 나니 무슨 신예 연주가라도 된 양 기고만장해졌다. 서양 클래식을 오래 들어왔고, 음반 수집에다 하이파이 오디오까지 음악을 평생 취미로 삼아왔지만 새로운 경험이었다. 음악이란 무엇인지 새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음악, 그중에서도 서양음악의 지배와 순수 및 대중음악의 구분짓기에 대해서는 평자들의 얘기가 구구하다. 클래식에 대한 숭배 못지않게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은 터이다. 부르주아 사회의 성립 이후 당대의 대중음악이던 클래식이 이제는 순수예술로 취급받고, 동시대의 유행 음악을 대중들의 소비적 음악으로 선을 긋는 것도 기현상이라고 한다. 서양 클래식의 지배도 전혀 음악적 우수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서양문화의 사회정치적 지배에 부수된 결과일 뿐이라고도 한다. 하긴 서양문물이 막 들어오던 시기에 클래식을 처음 접한 어느 예인이 말했단다. 이렇게 단순한 가락은 처음 듣는다고. 12박자 내지 24박자로 이루어진 우리의 복잡한 박자 감각으로는, 또 4박자 한 마디를 3박자로 나누는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감각으로는, 서양음악이 아무리 복잡해도 너무나 유치하게 들렸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을 천편일률이라며 지겨워하듯이.

서양음악이 발전시켜 온 형식에는 확실히 허구가 있다. 잭 런던의 소설 <마틴 에덴>을 보면 오페라를 처음 접한 주인공의 얘기가 나온다. 뚱뚱하고 작달막한 테너와 키가 비쭉하고 건장한 소프라노가 슬피 노래하며 부둥켜안는 장면에는 도저히 이입이 안되더라는 것이다. 예술에는 형식이 있고 그것을 통해 허구적 재현을 사실로 해석하는 것이 예술을 감상하는 법이라는 충고에, 마틴은 현실을 벗어난 왜곡에 무슨 가치가 있느냐며 반문한다.

몇 년 전 작고한 지휘자 아르농쿠르는 그의 책 <바로크 음악은 말한다>에서,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별다른 지시가 없더라도 곡의 조성과 진행 자체에 당대 사람들은 다 알던 일종의 어법 내지 말투가 있다고 했다. 이 얘기를 확장한다면, 오늘 우리가 듣는 서양 클래식이라는 화석 음악도 당대가 아닌 오늘의 어법에 담을 수 있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서양 것이든 우리 것이든 인간이 이룬 문화적 성과는 무분별한 추종이나 괜한 거부가 아니라 누구나 향유할 가치가 있다. “이미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게 하라.” 문제는 음악 또는 예술이 주는 깊은 정서적 경험을 맛볼 처지조차 되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점일 것이다. 음악과 함께하는 생활이 모두에게 가능한 세상은 언제쯤 올까. 아침마다 타는 일산 078번 버스기사님에게 뽕짝 좀 그만 틀고 KBS 라디오 <가정음악> 듣자고 하면 매우 재수가 없겠지?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