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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이제 산골 마을 논과 밭은 모두 겨울방학에 들어갔다. “아이고, 농사일이 오데 끝이 있는가. 고마 죽어삐야 끝나지.” 마을 어르신들이 죽어야 끝난다던 농사일도 잠시 방학이다. 이젠 틈틈이 뒷산에 가서 내년 가을까지 아궁이에 넣을 장작을 하거나 밭두둑에 비닐 대신 쓸 부엽토를 긁어 놓으면 된다. 그리고 장날에 가서 겨울 간식으로 먹을 옥수수와 현미 뻥튀기를 하고, 무를 썰어 겨울 햇볕에 말릴 때이다. 

밤이 오면 아내랑 돋보기를 쓰고 벌레 먹거나 쪼그라진 녹두와 팥을 가려내고, 빛깔 좋고 잘생긴 녀석들은 미리 주문한 분들한테 택배로 보내야 한다. 가끔 두더지가 파헤쳐 놓은 마늘밭과 양파밭에 가서 두둑을 꾹꾹 밟아 준다. 그래야만 긴 겨울 내내 뿌리가 얼어 죽지 않는다. 농약과 화학비료와 비닐조차 쓰지 않고 농사지으려니 생각보다 잔손질이 많이 간다. 그래도 겨울철 일은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오늘 못하면 내일 해도 그만이라 여유가 있다. 

얼마 전, 이웃 마을회관에 들렀다. 젊어서 고향 마을을 떠나 도시에서 살고 있는 어르신이 찾아와, 어릴 때부터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는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 이야기 같지 않아서 어르신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그대로 ‘명당’이란 제목으로 시로 옮겼다. 

“우리 마을은 명당이라/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왔잖어/ 샘골 어르신 큰딸 교장 됐지/ 덕수 양반 둘째 아들 대기업 부장 됐지/ 만덕이네 집에 공무원이 두 명이나 나왔지/ 그리고 상욱이네 막내아들은 검산가 뭔가……// 이 사람아, 명당이면 무엇 하나/ 고향 담벼락은 자꾸 무너지고/ 애들이 씨가 말라/ 중학교고 고등학교고 문 닫은 지 오랜데/ 그러니까 우리 마을은 명당이 아닐세// 낳아 주고 길러 준 고향은 나 몰라라 하고/ 도시에서 돈깨나 벌었다고 말이여/ 가끔 고향 찾아와/ 돈 몇 푼 던져 주고 가면 뭐 하겠나/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흙 밟으며/ 함께 살아야 명당이 되는 게지”

한평생 고향땅을 버리지 않고 농사지으며 살고 있는 어르신의 한숨 섞인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어르신 말씀대로 명당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함께 오순도순 살면 명당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고향 찾아와 돈 몇 푼 던져 주고 간다고 해서 명당이 되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산골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길가 여기저기 빛바랜 펼침막이 자랑삼아 겨울바람에 펄럭인다. “○○○씨 장남 외무고시 최종합격을 축하합니다.” “○○○씨 막내딸 사법고시 합격을 축하합니다.” 남보다 몇 배 더 부지런히 공부해서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을 시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펄럭이는 펼침막을 볼 때마다 나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다. 다만 펼침막에 이름 붙어 있는 분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난 사람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나는 가끔 이런 펼침막이 곳곳에 걸리는 꿈을 꾼다. ‘○○○씨 큰아들이 영혼 없는 도시에서 살다가, 드디어 마음 다잡고 고향 마을로 돌아온 것을 축하합니다.’ ‘도시로 나간 ○○○씨 막내딸이 농촌 총각과 혼인을 하여, 오래된 미래인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축하합니다.’ 바보같이 나만 이런 꿈을 꾸는 걸까?

<서정홍 농부 시인>

 

 

연재 | 시선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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