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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수의견>의 주인공은 신문사 기자가 자신의 동의도 없이 쓴 기사로 인해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주인공은 이 문제로 기자와 통화하면서 말한다.

“그냥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되지, 그 말이 그렇게 안 나옵니까?”

지금 우리 사회는 이 영화 속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간 논쟁이 연일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경숙 작가의 작품 ‘전설’이 일본 우익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했다는 소설가 이응준의 비판은 신경숙 개인의 작가윤리뿐만 아니라 한국 문단의 구조적 문제까지 주목하게 했고, 표절임을 확신한 많은 독자들은 신경숙 작가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독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신경숙 작가는 자신은 이 논란과 전혀 상관없으며, 대응할 가치도 없는 일이라고 언급했다. 거기에 더해 출판사 창비는 표절을 부인하는 글을 홈페이지에 올려 신경숙 작가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와 같이 표절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인 소설가와 출판사가 모르쇠 입장을 보이자, 사회적 비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출판사는 표절에 대한 입장을 다시 번복했다.

결국 신경숙 작가 역시 자신의 표절을 인정하는 인터뷰를 했지만, 이미 배신감에 등을 돌린 대중들은 작가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고 논지를 흐리는 비겁한 자세를 보였다고 평하고 있다. 이렇듯 누가 봐도 명확한 잘못에 대해서조차 분명한 사과와 반성이 배제된 채 사건이 적당한 수준에서 수습되는 이유는 과거의 유사한 경험에서 나온 판단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문제의 중심에 놓여 있는 소설가, 출판사 모두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잘못을 인정함으로써 자신들의 권위를 실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권위를 이용해 표절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안일한 생각을 했고, 대중들은 그 안일함에 분노했다.




비슷한 시기, 방송계에서도 이와 유사한 안일함이 대중들을 분노케 했다. 요리방송의 붐을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하는 한 셰프로 인해 문제가 불거졌다. 이미 다른 요리 프로그램에서 요리실력 논란을 일으켰던 셰프가 어떻게 요리에 대한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프로그램에 합류했는가가 주요한 논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제작진은 프로그램을 강행했고, 시청자들은 그가 요리실력으로 이 모든 논란을 종식시킬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그의 요리는 실망스러웠다. 시청자들의 불만이 쇄도했지만, 제작진은 안일함으로 대처했다. 셰프의 하차와 제작진의 사과를 기대했던 시청자들은 오히려 논란으로 인해 힘들었을 셰프를 두둔하고 위로하는 제작진을 보며 실망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셰프의 가족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해명글을 올리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 글은 문제의 본질을 벗어난 내용으로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러한 논란이 계속되면서 <냉장고를 부탁해>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은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원칙과 제작진이 구현하는 세계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책임자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은 꼴이 되었다.

사과(謝過)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사과하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보다는 오히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기 쉽다. 이는 신자유주의 경쟁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성공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시각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의 수준을 인정하고 배우는 자세를 취하면 전문성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진 셰프,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표절을 인정하지 않는 소설가, 시청률에 힘을 실어준 시청자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프로그램 제작에만 몰두하는 제작진, 높은 수익률을 올리는 데에만 집중한 나머지 독자와의 신뢰를 저버리고 권위만을 앞세우는 출판사. 이들은 모두 경쟁에서 밀려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외면하는 우를 범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실수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실수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이다. 만약 통렬한 자기반성을 통한 진정한 사과가 결여된다면 그 실수는 다시 반복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사과가 사라진 사회는 반복되는 실수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시청자들의 기대를, 독자들의 기대를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얻는 데에만 활용하려는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누군가를 빨리 만나고 싶다.

이종임 | 고려대 미디어학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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