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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씨는 베이비부머이자 하우스푸어이며 은퇴한 직장인이자 영세 자영업자이다. 한때 중산층이었던 그는 지금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을 운영 중이다. 개업 후 한동안 무탈하게 지내던 그에게도 최근 무한경쟁의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변두리에 속하는 상권에 규모가 큰 카페들이 속속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건물주는 다음 계약 시 임대료를 올리겠다고 통보했다. K씨는 대책 없이 근심만을 거듭하다가, 아르바이트생 P군이 커피전문점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서둘러 현실로 되돌아왔다. 지방 출신의 P군을 볼 때마다 자식 가진 부모로서 묘한 안타까움을 느끼곤 했다. 


K씨는 대졸자와 고졸자 간의 임금 차이가 크다며 내 자식만큼은 반드시 대학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넘쳐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 역시 그중 한 명이었으니까. 하지만 K씨는 그런 차별이 대학이 실제로 전공 지식이나 특정 기술을 학생들에게 전수한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고교 졸업자의 80퍼센트가 대학에 진학한다고 해서 그들의 지적 역량과 학습 능력이 정규분포곡선상에서 갑자기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연유로 K씨가 보기에 지금 ‘대학생’이라는 직함의 진정한 의미는 그 직함의 보유자가 취업 준비를 위해 ‘청춘’의 시간을 연장해 또래 집단과 인맥을 쌓고 ‘스펙’을 만드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대학생이라는 직함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매년 1000만원에 가까운 등록금이 그것이었다.


(경향DB)


확실히 P군의 인생 전략은 초장부터 잘못된 길로 접어든 듯 보였다. P군은 학자금 대출로 등록금을 지불하며 대학생이라는 ‘청춘’의 시간을 얻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획득한 시간을 자신의 노동력까지 보태 5000원에도 못 미치는 헐값의 시급을 받으며 K씨에게 되팔고 있다. 등록금과 아르바이트 임금을 둘러싼 두 번의 거래. 아마도 P군은 졸업할 때까지 이 이상한 거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K씨는 청소 중인 P군을 보며 자문해본다. 하긴 우리나라 역사에서 계급사회가 아니던 시절이 있었던가? 고도성장의 시동을 걸었던 1960년대 후반부터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0년대 후반까지 약 30년의 시간대가 오히려 비정상적인 시기가 아니었을까? 그 시기에 사회 이동의 촉매제였던 교육은 이제 계급 대물림의 수단으로 변모하고 있지 않은가? K씨는 P군이 이 이행 과정의 희생양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P군의 고난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P군은 지금 고시원에 거주 중이다. 한편에서 대학 교육이 얄팍한 희망을 던져주며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중상류층 건물주들이 K씨나 고시원 사장 같은 자영업자들을 중간책으로 내세워 갑·을의 다단계 구조를 만들고 그 제일 밑자리에 P군 같은 청년들을 밀어넣고 있다고나 할까? 경제성장이 한계에 도달하면, 자산 보유자나 중산층의 일부는 ‘젊은 세대’의 미래를 볼모 삼아 새로운 생존전략을 구상하게 마련이다. 이 대목에서 K씨는 P군에게 일말의 가책을 느꼈다.


서울 대학동의 한 골목길에서 행인이 고시원과 원룸 전단지를 보며 걷고 있다. (경향DB)


아르바이트생이면서 대학생이며 채무자이면서 항구적인 소비자로 살아가야 하는 분열적인 상황. P군은 일을 마치면 김밥을 사 고시원으로 향할 것이다. 피곤에 찌든 그의 몸은 쓸쓸하게 계단을 밟고 올라가겠지만, 그의 가슴속에 쌓인 많은 말들은 발설되지 못한 채 발밑으로 가라앉아 흩어질 것이다. 그는 창문이 없는 쪽방에서 컴퓨터 스크린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것이며,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머릿속이 이 방의 구조와 닮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품어보기도 할 것이다. 처지가 이러하니 그가 일베 사이트에 들어가 댓글놀이를 즐긴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박해천 | 디자인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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