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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큐브’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지하다시피 큐브는 부모의 곁을 떠나 독립을 준비하는 청춘을 위한 방들의 군락지로 출발했습니다. 고도성장의 시기, 많은 젊은이들이 서울에 올라와 하숙방, 벌집, 고시원, 원룸 등과 같은 큐브의 ‘방’들을 전전하면서 학교나 직장에 다니면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했지요. 그들 대부분은 인생의 중간 목표로 ‘결혼’과 ‘내 집 마련’을 설정하곤 했습니다.


큐브와 그 거주자들의 삶에 급격한 변화가 찾아온 것은 IMF 외환위기 이후였습니다. 분양가 상한제 폐지와 부동산 폭등세로 인해 사실상 ‘내 집 마련’의 꿈이 물거품이 되었지요. 그 이후 큐브는 실제로 방에서 방으로의 이동만을 허용하는 폐쇄계, 그러니까 환승역이 존재하지 않는 순환선의 세계로 변모했습니다.


두평 남짓한 방들이 다닥다닥 붙은 벌집. (경향DB)


이 과정에서 큐브의 세입자들이 지불하는 임대료는 큐브에서 빠져나와 그 바깥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윤활유로 기능했습니다. 거주용 방의 경우에는 세입자-집주인-은행의 경로를 따라 단방향으로 흘러갔지요. 이와 같은 임대료의 흐름은 서울에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탈산업의 악성 빈혈에 시달려야 했던 거대 도시에 임대료는 주기적으로 맞아줘야 하는 링거액 같은 것이었지요.


한편, 큐브는 IT산업의 핵심적인 시장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정보서비스업은 인터넷과 무선망을 통해 사용자에게 가상의 방을 제공하는 사업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용자와 컴퓨터 사이에, 혹은 스마트폰 사이에 포털, 게임, 공유 등 각종 정보 콘텐츠로 구성된 가상의 방을 임대해주고, 그 대가로 사용자의 ‘시간’을 챙기는 식이지요.


사실 ‘창조경제’란 것도 이런 맥락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큐브의 공식 입장에 따르면, 창조경제란 다종다양한 첨단 정보 기술을 총동원해, 이전에 비해 구매력이 현저히 낮아진 젊은 소비자 집단의 ‘시간’을 현금화하는 방법을 고안해내고 이를 다시 미래의 비즈니스 모델과 연결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을 통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큐브는 창조경제가 소비자로 상정하는 이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렇게 큐브는 세입자가 지불하는 임차료의 복잡다단한 순환계로서 도시 경제를 살리는데 그치지 않고, 갈 곳 없는 청춘들의 시간이 고여 있는 거대한 저수지로서 창조경제의 에너지원 구실을 하는 데까지 나갔던 것입니다. 정말로 장족의 발전이었지요.


(경향DB)


이런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큐브 거주자들 일부는 여전히 큐브 바깥의 세계로 탈출하려고 발버둥치곤 합니다. 이미 오래전에 집으로 향하는 사다리가 사라졌는데도 말이지요. 물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월세 내기도 지겹다며 차라리 은행에 이자를 내고 말겠다며 대출을 받아 집을 장만하거나, 부모의 집에서 그들과 함께 살거나, 부모로부터 집을 증여 받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이미 오를 대로 오른 집값에는 턱없이 못 미치지만 그래도 내 집 마련의 꿈을 포기하지 않을 정도의 연봉을 지불하는 직장 혹은 직업을 갖기 위해 부모의 노후 준비 자금을 털어 무한 경쟁의 교육 시장에 뛰어드는 것이지요. 이 네 번째 방법은 여전히 중산층 사이에서 인기가 높습니다. 하지만 그리 추천하고 싶은 방법은 아닙니다.


당사자들이야 먼 훗날에야 깨닫게 되겠지만, 따지고 보면 아버지의 집을 담보로 잡아서 아들의 집을 마련하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교육’을 매개 항으로 삼는 꽤나 복잡하고 매우 비효율적인 증여의 셈법인데, 게다가 성공 확률도 갈수록 낮아지고 있으니 큰 문제지요. 차라리 그냥 집을 증여해주라고 조언하고 싶은 심정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이만 총총.




박해천 | 디자인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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