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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밑에 이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레 한 해를 되돌아보게 마련이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어두운 대낮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어느 해라고 유난스럽지 않았으랴만 올해 역시 지독한 한 해였다. 지독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고 절망하지 않은 게 기이할 만큼 절망적인 시간들이었다.

절망이라는 낱말은 환자복과 비슷한 면이 있어서 멀쩡한 사람도 환자복을 입으면 중병을 앓는 것처럼 보이듯이 절망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절망이 일상적이 되면 절망을 초래한 상황에 무심해지고 자신이 절망하고 있는지 아닌지조차 구분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흔해 빠진 절망에 굴복하지 않으려면 쉽게 절망하지 말아야 하며 일단 절망하게 되면 그것을 깊이 사랑해야 한다.

나는 이 비루함을 한없이 사랑하여 숭고해지고 장엄해진 사람을 알고 있다. 그이는 바로 오래전 세상을 떠난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내가 아직 초등학생일 때 세상을 떠났다. 상여가 나가던 날 진눈깨비가 흩날렸는데 차갑고 어둡던 그 겨울의 이미지는 오래도록 내 안에서 살아남아 절망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생생하게 되살아나곤 했다. 낡은 책상의 서랍에서 뜻밖에 찾아낸 어린 시절의 보물을 보듯 반쯤은 애틋하고 반쯤은 서러운 마음으로 그날을 비롯해 할머니와 나누었던 추억들을 되새겨보곤 했다.

내 기억 속에서 할머니는 정갈하기 그지없었다. 말수가 적었던 분인지라 사기그릇에 담긴 물처럼 고요한 분이었는데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때로는 야속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시절 할머니 연배의 동네 어른들도 대체로 그러했다. 기쁘다고 너무 큰 소리로 웃으면 들어온 복이 나갈까 두려워 슬쩍 웃고 말았으며 슬프다고 통곡하면 더 큰 화를 불러들일까 두려워 애써 참으며 속울음만 울고 말던 이들이었다. 희망에 열광하지 않고 절망에 좌절하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중용이라 해도 좋을 법한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정말 그랬을까. 나 역시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도 다른 이들처럼 사연 많은 사람이었다. 당신은 모두 아홉 명의 자녀를 출산했으나 그 가운데 겨우 둘만이 살아남았다. 자식 하나를 앞세워도 어미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게 마련인데 일곱 자녀를 앞세워 보낸 어미의 심정이 어떠할지는 짐작하기조차 쉽지 않다. 더러는 병으로 더러는 사고로 잃었다. 그때마다 당신은 죽어가는 자식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을 것이다.


11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민중대회에 참석했던 농민 백남기씨가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있다._경향DB


그러나 살아생전의 할머니 얼굴에서 일곱 자식을 앞세운 어미의 표정이라 할 법한 특별한 고통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고통스러운 삶이었음이 분명한데도 고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그 고통은 어디로 간 것일까. 치유되어 사라졌던 것일까. 지금에 이르러서야 나는 할머니가 그 고통을 껴안고 살았던 것이리라 짐작한다. 고통은 치유되지 않았고 치유될 수도 없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내칠 수도 없었다. 슬픔에 빠져 있을 수만도 없었다. 그런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건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었으리라. 고통과 더불어 산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는 나 역시 알 수 없다. 다만 그와 같은 절망적인 현실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리라 짐작할 수밖에.

올해도 저물어간다.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농민은 한 달 남짓 의식불명 상태이건만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커녕 진심이 담긴 사과를 표명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세월호 참사를 목격했던지라 새삼스럽지는 않다. 우리는 절망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권력에 의해 한 시민이 죽어가는데도 반성하지 않는다면 이런 권력을 대체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이런 게 바로 학살정권 아니던가. 반성하지 않는 권력이라면 부숴야 함이 옳지 않겠는가.


손홍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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