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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친구 집에 모여 낮부터 술을 마셨다. 곱창전골을 끓이고 소고기도 좀 구웠다. 모이면 수다가 끊이지 않는 모임이건만 몇 시간 동안 대화가 거의 없었다. 함께 <응답하라 1988>을 몰아서 봤기 때문이다. 평소 TV를 보지 않는 터라 말만 들었지 실제로 시청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 드라마는 1971년생 친구들과 그 부모들의 이야기다. 1980년대와 함께 그들은 10대를 맞이했다. 통행금지가 해제되고 교복 및 두발 자율화가 시행됐다. 컬러TV의 시대가 열렸다. 자유라는 개념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기도 전에 자유와 풍요 속에서 사춘기를 맞이했던 세대다. 그들에게 가장 큰 자유, 즉 드라마에 나오듯 매일 친구 집에서 함께 놀 수 있었던 자유는 어디서 왔을까. 사교육 금지다. 단과 학원을 제외한 일체의 사교육이 허용되지 않았으니 엄청난 잉여 시간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물론 드라마에도 나오듯 비밀과외가 있었지만 보편적이진 않았다.
공부를 잘한다고, 집이 잘산다고 무조건 과외를 하지는 않았다. 해봐야 일주일에 두 세번, 두시간씩이 고작이었다. 과외를 하든 안 하든 시간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많으면 놀기 마련이다.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 공통의 관심사를 추구한다. 그러면서 자의식을 성장시키고 평생 잊혀지지 않는 추억거리를 채워나간다. TV와 잡지, 라디오가 신문물을 접할 수 있는 통로의 전부였던 그 시절, 취미의 대부분은 독서와 음악감상이었다. 여가 시간은 많았으나 여가를 채울 내용은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때였으니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자신의 방에 전화나 TV가 있는 경우는 희박했지만 웬만하면 엄마를 졸라서 산 워크맨 하나씩은 있었다. 밤마다 이어폰을 끼고 라디오를 듣는 건 그때 누릴 수 있는 온전한 개인만의 시간이었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교양 필수였다면 황인용의 <영팝스>, 김광환의 <팝스 다이얼> 등이 전공 필수였다. 전영혁의 <음악세계>는 파고드는 자들을 위한 전공 선택이었다. 동물원의 ‘거리에서’가 별밤을 통해 처음으로 흘러나온 다음 날, 학교에서는 “야 어제 그 노래 들었냐”로 시작되는 얘기가 오가기 마련이었다. 반마다 몇 명씩 있었던 골수 음악 마니아들은 그들과 말을 잘 섞지 않았다. 원래 어설픈 고수들은 초보를 상대하지 않는 법이니까. 대신 쉬는 시간마다 <음악세계>에서 들었던 70년대 록 명반을 화제로 토론을 벌였다. 이 토론의 승자는 역시 음악 마니아를 형 누나로 둔 아이들이었다.
아날로그 감성 ‘워크맨’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방송 장면 캡처._경향DB
라디오에서 쌓인 지식과 호기심을 푸는 곳은 청계천이었다. 청계고가가 서울의 중심부를 가르고 있었던 그 시절, 청계천4가 세운상가와 청계천8가 황학동은 애호가들의 메카나 마찬가지였다. 4가에는 음반 도매상들과 ‘빽판’ 가게들이, 8가에는 ‘원판’ 가게들이 있었다. 국내에서 불법으로 복제된 음반을 빽판이라, 중고 수입 음반을 원판이라 불렀다. 주말이 되면 버스를 타고 청계천4가에서 빽판과 신보를 가득 고른 후 8가까지 걸어갔다. 원판은 비쌌기에 주머니 사정상 함부로 살 수 없었다. 좀 유명하다 싶으면 당시 가격으로 3만~5만원은 기본이었다. 대신 교보문고에서 책을 읽듯 음반을 구경했다. 빽판, 심지어 라이선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선명한 인쇄의 커버를 구경하는 게 곧 음악 공부였다. 음악을 들어볼 수 없으니 처음 보는 음반 안에 어떤 음악이 담겨 있을지 상상하기도 했다. 커버가 맘에 들어 질렀다가 후회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응답하라 1988>에선 아마 청계천 키드들의 주말을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2차 베이비붐 세대들 중에서도 그런 마니아들은 소수였으니. 다만 워낙 사람 수가 많다 보니 소수의 비율로도 충분히 상권 하나를 형성하고 라디오 프로그램 한 두개를 지속시킬 힘이 되었던 것이다. 해가 넘어가기 전, 청계천8가에 오랜만에 가볼 생각이다. 최근 LP붐 때문에 다시 활기를 띠고 있는 ‘원판’가게에 마니아들의 ‘응답하라 1988’이 있을 터이니.
김작가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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