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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 제3공화국이 시작된 바로 그 해에 태어난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온전히 박정희 정권의 이념에 길들여져 자랐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추진된 교육과 문화, 예술 정책의 세례를 직접적으로 받아왔던 것이다. 학교 수업시간의 대부분은 반공, 민족주의, 박정희 개인에 대한 우상화, 기타 다양한 정부 시책의 적극적인 동조와 고양에 바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좋아하던 미술시간에는 반공과 충효사상을 고취하는 포스터 제작, 수없이 많았던 정부 시책 선전용 포스터(혼·분식 장려운동 및 새마을운동, 물자절약, 순국선열 추모, 산아 제한, 불조심 등) 그리기가 거의 전부였으며 국어시간 역시 그와 연관된 작문, 표어 작성 등으로 보냈다.
어린 시절의 나를 지배해온 구호의 대부분은 반공, 방첩, 애국·애족적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는 코드는 어렸을 때부터 줄기차게 받아온 교육들이었다. 당시 그것들은 이미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었다. 그 구호들의 호명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기계가 되었다. 1970년대는 그 지긋지긋한 말씀들의 악몽이 가장 번성하던 시대였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 되면 우리 모두는 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그곳에서 호국영령들을 기리는 미술대회에 참여했으며 반공 영화를 단체 관람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다 입이 찢어져 죽었다는 이승복을 떠올리면서 공포와 두려움을 내재화하면서 자랐다. 1968년 강원도 평창의 두메산골에 사는 9살 소년 이승복이 무장공비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이후 20여년간 이승복의 ‘반공 영웅화’가 국가정책으로 추진되었다. 전국의 많은 초등학교에는 이승복 동상이 세워졌는데 앞섶에 단추 다섯 개 달린 학생복을 입고 오른손을 치켜들고 왼손에는 보자기에 책 몇 권을 싸들고 있는 입상이다. 1970년대 이후 남한 땅에 가장 많이 세워진 인물상이 바로 이 이승복상이었다.
최정화 컬렉션 반공소년 이승복상_경향DB
이승복 신화는 초등학생용 교과서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시멘트로 조악하게 만들어진 이순신 장군과 이승복 형님 동상이 놓인 운동장에서는 군대 사열과 같은 조회가 자주 열렸다. 내게 학교 운동장은 지루한 교장선생님의 훈시와 국민체조, 교련, 체력장, 선착순, 분열, 열병, 제식 훈련, 봉체조, 총검술 따위와 함께 떠오른다. 늘 전쟁 공포와 반공 이데올로기만이 주입되던 어린 시절 학교의 수업시간은 그런 면에서 불우하고 참담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장밋빛 청사진의 미래를 제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과 공포를 동시에 심어주던 그 시절은 한마디로 집단적인 최면, 전체주의적 국가관이 횡행하던 암울하고 폭력적인 시대였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문화예술 또한 반공주의와 민족주의의 강제된 이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당시 미술계를 움직인 주요 동인은 단연 국가의 문화정책이었다. 미술을 독재적 정치권력에 조력하는 도구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민족기록화와 위인 동상 제작 등을 비롯해 국가 시책을 홍보하는 차원에 미술을 종속시키는가 하면 국가의 이념에 반하는 모든 미술행위는 제지되었다. 당연히 정치와 현실 문제 등은 미술에서 다루어질 수 없었다. 오로지 ‘순수미술’만이 허용되었다. 미술의 역할이 그만큼 제한되었으며 왜곡되었다. 당시 국가 차원의 미술 제도 정비는 일정 부분 교조적인 민족주의 이념과 정권의 안정을 위한 도구화와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1963년, ‘주체적 민주주의, 민족주의’를 국정 지표로 삼아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래 3선개헌과 10월유신을 통해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독재체제를 강화하고, 10·26으로 그 종말을 고하기까지 제3, 제4 공화국에서 미술 제도나 정책은 민족과 국가를 주체로 한 미술의 정체성의 화두를 제기하는 한편, 정권의 홍보 도구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미술인들의 정치 예속과 정권의 미화를 한층 부채질하는 해악으로 이어졌으며, 미술계의 이슈를 헤게모니 장악의 차원으로 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그 시기의 악몽으로부터 멀어지나 했더니 근자에 이르러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여러 조짐이 일고 있다.
박정희 시대를 추억하는 향수와 복고가 이루어지는가 하면 당시의 통치방식이 반복되고 있기도 하다. 그 시대가 다시 유령처럼 재림하고 있음을 보면서 무척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지난 역사와 과거에 대해 지나치게 무심하고 관대한가 하면 너무 빠르고 거친 망각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다시 그 암울하고 황폐한 시대를 이렇게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해 과연 무엇을 배우고 있는 걸까?
박영택 |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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