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박해천 | 홍익대 BK연구교수·디자인연구
일단 전설적인 1980년대에서 시작해 보자. 5월 광주로부터 3저 호황을 거쳐 88올림픽에 당도하는 기이한 역사. 군사정권의 폭압정치에도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던 청년들이 있었고 그들은 이전 세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변화를 꿈꾸었다. 과학과 이성의 힘을 믿었던 그들은 서슬 퍼런 반공의 칼날 아래서도 거침없이 ‘혁명’이라는 단어를 발설하곤 했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 편이 아니었다. 1987년 민주화 투쟁 이후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1991년 소련의 해체는 그들의 청춘에 종지부를 찍는 서글픈 사건이었다. 누군가는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고 말했고, 또 누군가는 ‘오죽하면 내 눈물마저 나를 배신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이념의 강철 대오가 무너진 자리에서 젊음의 열정도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전선에서 벗어나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대기업과 언론사에 취업했으며 고시를 준비하거나 출판사를 차렸고, 그와 함께 진정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진정성은 1980년대의 젊은 생존자들이 자신 세대의 집단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공유한 윤리적 에토스였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1990년대의 반짝 호황에 뒤이은 외환위기와 정권 교체. 보수 일간지 덕분에 이제 ‘386’이라는 어엿한 이름을 갖게 된 그들은 빠듯하게나마 중산층으로 살아가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하는 처지였다. 아버지 노릇이 주업무가 된 그들 사이에선, 종종 ‘이게 사는 건가’라는 물음과 함께 개혁에 대한 열망을 담은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옛 친구들과의 술자리 주변을 벗어나지 못했다.
바로 그때, 한때 청문회 스타였던 정치인이 유력 대선 후보로 떠올랐다. 정치 입문 이후 고난의 길을 자청해 걸었던, 그래서 ‘바보’라 불렸던 그 정치인이 내세웠던 구호는 다름 아닌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민주화 이후 줄곧 지역감정과 합종연횡이 난무하던 선거판에서, 그만이 홀로 변화에의 갈망이 담긴 눈물을 흘리면서, 386세대가 애써 잊고 지내려던 청춘의 기억들을 소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진정성’ 그 자체인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진정성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것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었지만,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진 못했다. 그의 지지자들 일부는 시간이 흐를수록 진정성이 무능력의 동의어가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대선에선, 진정성 따위는 고민해 본 적이 없을 것 같은 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또 5년이 흘렀고, 세상은 더 망가졌다. 600만의 비정규직과 1000조원의 가계대출, 1000만원대 등록금과 연간 30조원 규모의 사교육 시장, 40만명으로 줄어든 연간 출생 인구 등등. 이로 인해 사람들은 사회안전망 없이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선에 출마한 야권 후보들, 그리고 그 주변에 모여든 386세대 인사들은 일단 자신들의 진심을 믿어 달라고 나서면서, 또다시 ‘진정성’이라는 익숙한 레퍼토리를 꺼내 들고 있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약간 진일보한 양상이다. ‘멘토링’과 ‘힐링’ 기능의 탑재로 한층 업그레이드된 ‘진정성의 리더십’. 진정성의 윤리와 진정성의 정치에 뒤이은 진정성 3부작의 완결편 같은 모양새다.
강금실 전 법무장관은 자신의 트위터에 “과거사를 사과하고 오후에 말춤 추는 건 좀 그렇네 머쓱”이라고 썼다. (경향신문DB)
그런데 혹시 이 세 번째 ‘진정성’은 현재의 위기를 돌파할 능력도, 전략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동원된 수사가 아닐까? 실제로 대선이 3개월도 남지 않았건만, 유권자들은 TV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했던 해당 후보의 인상을 떠올리며 관상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그들의 진심을 파악해야 하는 처지다. 그러니 의심과 냉소가 늘어가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지난 20년간, 특정 세대의 애창곡으로 매번 리메이크되어 온 진정성 타령에 이제 질려버린 탓일 테니 말이다.
'정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동칼럼]느껴지지 않는 정치 (0) | 2012.09.27 |
---|---|
[녹색세상]‘성장’에 대한 신앙을 버려라 (0) | 2012.09.26 |
[시론]4대강 공익신고자 입 막는 권력 (0) | 2012.09.25 |
[사설]내년 예산 너무 낙관적 전망 근거한 것 아닌가 (0) | 2012.09.25 |
[경향논단]안철수 현상의 실체 (0) | 2012.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