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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일 | 경북대 교수·신문방송학


 

돈은 잘 벌어다 주는데 종종 엄마를 때리는 아버지, 늦은 밤 귀가해 술 취한 얼굴로 “나처럼 성공하려면 공부 열심히 하라”는 아버지. 이런 ‘유능한 나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은 ‘무능한 착한 아들’이 되기 쉽다. 둘의 화해는 쉽지 않다. 아들은 수혜보다 피해를, 아버지는 피해보다 수혜를 앞세우기 마련이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나쁨에만, 아버지는 아들의 무능에만 집착하게 된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아들은 유능을 나쁨과, 아버지는 착함을 무능과 동일시하는 착시에 빠진다. 나아가 아버지는 유능을 나쁨으로 표현하고 아들은 착함을 무능으로 증명하려는 착란에 도달한다.


 이 상태는 일종의 도착이다. 서로가 상대를 온전한 인격체가 아닌 사물화된 이미지로 대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상태는 또 일종의 ‘적대적 공생’이다. 서로가 상대를 통해서만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관계는 접점이 없다. 화해의 실마리를 만들려면 누군가 외부에서 중재에 나서야 한다.


요즘 안철수 지지자들이 기성정치권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지 않나 싶다.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에 집착하는 여당과 ‘사는 문제’를 제기하지만 무능한 야당의 구도로는 안 된다는 것. 그들에게 여당은 과거에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세력이 아니라 현재 ‘사는 문제’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세력으로 비친다. 야당은 지금 ‘사는 문제’를 말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위태롭게 할 세력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불임의 대결구도를 풀어 나갈 해결사로 ‘유능하고 착한 아들’인 안철수를 연호한다. 이른바 ‘안철수 현상’이다.


안철수 생각 (경향신문DB)


그런데, 안철수 현상은 실체가 모호하다. 무엇을 부정하는지는 선명한데, 무엇을 긍정하는지가 불분명하다. 이런 현상은 정책의 부재 탓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안철수 현상은 지지자의 정체성이 모호해서, 안철수에게 거는 기대가 하나의 정치적 비전으로 통일되기 어렵다. 선명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기도, 구체적인 정책을 내놓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출마선언에 비친 후보 안철수의 안철수 현상 해석은 ‘중도’라는 위치 설정에 그쳐 있다. 그 누가 안철수 현상을 현실화할 인물로 캐스팅된다 해도 이 곤경은 마찬가지다. 안철수 현상과 안철수 개인을 나누어서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철수 현상은 새로운 정치적 갈망이 개인 안철수를 통해 폭발한 정치적 사건이다. 정치적 실체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지만, 나는 형체는 모호하지만 실체는 있다는 의견을 지지한다. 그리고 그 정치적 실체를 ‘먹고사는 문제’에서 ‘사는 문제’로 정치적 의제설정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라는 강력한 요구로 본다. 1%가 잘 먹고사는 사회에서 99%가 지금보다 잘 사는 사회로 가자는 거다. 이 요구는 개인이 단기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변화를 원하는 세력이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과제다. 이 때문에 안철수 현상은 리더 개인이 아닌 리더십에 대한 요구로 해석돼야 한다. 안철수는 한국 정치가 채워야 할 공백이라는 얘기다.


야권 지지자에게 이번 대선은 안철수 현상을 이끌어 갈 첫 주자를 뽑는 무대다. 적임자의 조건으로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나빠지지 않을’ 착함과 ‘시민들이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나빠지지 않게 해줄 수 있는’ 유능함이 요구되는 것 같다. 안철수 지지자들이 안철수에게 본 가능성의 이미지, 안철수 현상이 요구하는 리더십의 형상이 바로 이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는 안철수와 문재인이 큰 차이가 없다. 문재인을 ‘기성정치인’으로 표현하는 것은 안철수를 ‘착한 자본가’로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껍데기만 보는 것이다. 문재인은 정치판 한가운데서도 결코 ‘기성’이 되지 않았고, 안철수는 자본이 많지만 끝내 ‘자본가’의 길을 걷지 않았다.


앞으로 적자의 자리를 두고 두 후보의 자질과 품성을 가늠하는 언설이 더욱 치열하게 경합할 것이다. 현실정치의 당파논리가 안철수 현상의 정치적 실체를 해칠 수도 있다. 안철수 현상의 실체에 대한 야권 지지자 전체의 강한 공감대 형성이 소금이 될 것이다. 통합의 관건은 ‘누구’가 아니고 ‘어떻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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