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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오랜 취미는 바둑이다. 기력은 아마 4단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은 야당정치인 시절 서봉수 9단과 조훈현 9단의 대국을 자주 복기했다고 인터뷰에서 말한다. 바둑애호가 문 대통령은 책 <신의 한 수 인간의 한 수>에 추천사를 남기기도 한다. 2017년 11월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대통령은 중국 리커창 총리와 비공개로 바둑을 소재로 환담을 나눈다.

바둑에 위기십결이라는 용어가 있다. 실전에 도움이 될 만한 4자성어를 의미하는데 이는 바둑형세에 따라 반대로 해석하기도 한다. 위기십결처럼 모든 바둑기사는 자신만의 위기타개법을 활용한다. 소개하는 프로기사 서봉수는 입단 시절부터 극단적인 실리바둑을 구사했던 인물이다. 그는 학생 시절 동네기원에서 어깨 너머로 바둑을 배운다. 서봉수는 독학과 내기바둑으로 미래의 프로기사를 꿈꾼다.

한국은 일본이나 중국과는 다른 바둑을 지향했다. 모양을 중시하는 일본바둑, 초반포석이 엉성한 중국바둑이 1980년대 세계 바둑계의 현실이었다. 한국은 모양에 연연하지 않는 실전형 바둑에 전념했다. 그 중심에 서봉수라는 절세의 승부사가 버티고 있었다. 일본 유학파인 조훈현이 천재기사로 이름을 날릴 때 서봉수는 국산바둑의 자존심으로 통했다.

서봉수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바둑은 조남철, 김인, 조훈현, 이창호로 이어져 왔다고. 이창호를 제외한 세 명은 1970년대 이전까지 최강으로 군림했던 일본에서 바둑유학을 했던 인물이다. 한국바둑이 일본바둑의 영향권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시절이었다. 1972년 서봉수는 약관의 나이로 일인자 조남철 8단으로부터 명인전을 가져온다. 2세대 대표기사 김인 역시 서봉수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서봉수의 전성기를 가로막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조훈현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세고에와 술꾼 후지사와가 자식처럼 아끼던 제자인 그는 서봉수와 함께 1980년대 한국바둑계를 ‘조서시대’로 양분한다. 승률은 조훈현이 두 판을 이기면 서봉수가 한 판을 이기는 판국이었다. 이후 서봉수는 조훈현과 수백 판의 바둑을 두면서 승부근성을 키운다.

1990년대는 전영선과 조훈현의 제자인 이창호의 시대였다. 그 와중에도 서봉수는 세계바둑대회에서 녹슬지 않은 기량을 발휘한다. 1993년. 바둑상금 규모로 최대 기전이던 응창기배에서 ‘반상의 미학자’라 불리던 오다케 9단을 누르고 당당히 우승을 차지한다. 경기에 대한 부담으로 불면과 구토를 반복하면서 이뤄낸 국산바둑의 소중한 결실이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서 9단은 1996년 12월부터 1997년 2월까지 열린 진로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중국과 일본 대표선수 9명을 연속으로 무너뜨리고 한국우승을 갈무리한다. 2016년 지지옥션배에서도 9연승이라는 노장투혼을 선보인다. 실리와 전투를 혼합한 바둑을 구사하는 서봉수는 스스로를 기초가 없는 바둑기사라고 소회한다. 권투로 치면 맷집이 좋은 변칙복서의 분위기가 풍기는 프로기사다.

바둑은 강인한 체력과 고도의 집중력을 요한다. 따라서 바둑기사의 전성기는 10대 후반에서 길어야 30대 후반이 고작이다. 젊은 기사의 치밀한 수읽기를 상대하기가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50년 세월을 버틴 서봉수류 바둑 또한 변신하고 있다. 그는 이제 승부보다는 바둑 자체를 즐기는 일상을 추구한다. 반상의 승부사는 죽는 날까지 바둑을 두는 게 유일한 소원이라고 말한다.

어지러운 세월 속에서도 한국바둑은 싱그러운 낭만이 있었다. 연신 장미담배를 피워대던 조훈현 9단. 속기바둑의 대명사 서능욱 9단.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모델이던 이창호 9단. 그들은 한국바둑의 고마운 증인들이다. 어지러운 현대사 속에서도 바둑은 일본과 중국을 압도한다는 자부심을 국민에게 선사했다. 이제는 된장바둑의 길을 열었던 서봉수와 이창호의 뒤를 박정환 9단이 이어가고 있다.

북·미 간의 협상이 다각도로 진행 중이다. 서봉수의 투박하지만 치열한 바둑과 흡사한 시국이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서 명인의 잡초바둑처럼 강하고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기를 염원한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음란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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