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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법원장 35명이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의혹 수사를 사실상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들은 지난 7일 간담회를 열어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자들에 대해 형사상 조치를 취하지 않기로 한 특별조사단의 결론을 존중하며, 사법부에서 고발·수사의뢰 등의 조치를 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밝혔다. 법원장들은 양 전 대법원장 시절의 문제에 공동책임을 져야 할 인사들이다. 자중하고 자숙해도 모자랄 처지에, 형사조치가 부적절하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하고 나서다니 기막힐 따름이다. 사법 신뢰가 더 추락하든 말든 자신들을 포함한 고위법관들만 보신(保身)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인 듯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외면한 안이한 인식, 법 위에 존재하는 듯한 오만한 태도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찬희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이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변회 회관 앞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당시 ‘사법농단’을 규탄하는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박광연 기자

특히 우려스러운 대목은 재판거래 의혹 제기에 대해 ‘합리적 근거가 없다’고 단정 지은 부분이다. 의혹이 제기된 사건 가운데 일부는 문건 작성 시점과 재판 결과 등에 비춰볼 때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가능성이 짙다. 대표적 사례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사건이다. 2015년 2월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을 인정한 항소심 이후 법원행정처는 청와대의 ‘전원합의체 회부’ 의중을 파악하고, 증거능력 인정 여부 등 핵심 쟁점을 정리한 문건을 작성해 대법원 재판연구관에게 전달했다. 사건은 이후 전원합의체에 회부됐으며, 대법관 13명은 전원일치로 일부 증거의 증거능력을 문제 삼아 원심을 파기했다. 문건 내용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전교조 법외노조 효력 집행정지 사건, 발레오만도 노조 조직형태 변경 사건도 마찬가지다. ‘재판거래 의혹에 합리적 근거가 없다’는 법원장들의 주장이야말로 합리적이지 않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가운데)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2015년 7월 대선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전원합의체 선고를 하기 위해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 들어와 자리에 앉고 있다. 김영민 기자

일선 판사들은 연일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고, 법원노조 지부장은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법학전문대학원생 300여명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전국의 변호사들은 오는 11일 시국선언을 할 예정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과 참여연대는 진상규명 조치를 요구하는 진정을 유엔에 제기했다. 사법부의 ‘초엘리트’라는 법원장들만 다른 행성에 살고 있는 것인가.

김명수 대법원장은 8일 사태 수습 방안과 관련해 “원칙적으로 법원 내에서 해결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심은 이해하나, 사법부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 김 대법원장은 11일 열리는 전국법관대표회의 의견을 수렴하는 대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시민의 분노가 임계치를 넘어서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사법의 권위는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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