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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란 법으로 규정하는 일종의 반사회적 행위다. 죄의 원천을 단순히 개인이냐 사회구조냐에 따라 판단하는 이원론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한다. 개인과 사회는 거대하고 복잡한 상관관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범죄율 또한 마찬가지다. 만약 범죄율을 의도적으로 높이려는 세력이 존재한다면 이는 어떤 연유에서일까. 

미국에선 실제 범죄율을 높이는 전략으로 정권을 창출하거나 유지하는 사례가 있었다. 4선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20여년에 이르는 민주당의 전성시대를 이끈 인물이다. 민주당의 독주로 위기에 처한 공화당은 1960년대에 ‘분할정복’이란 정치전략을 시도한다. 분할정복은 가난한 백인이 부유한 백인을 배척하지 않도록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종에게 반감을 품게 유도하는 이중전략이다. 

문제는 분할정복전략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 높은 범죄율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방범시스템이 견고한 부촌에서는 범죄율의 상승 여부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반면 슬럼가나 도심에 거주하는 저소득층과 중산층은 범죄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범죄에 노출된 저소득층은 유사 계급에 반감을 가진다. 계급 간의 갈등을 조장한 포퓰리즘에 이용당한 중산층 이하의 유권자는 정략적으로 범죄소탕을 외치는 공화당에 표를 몰아주기 마련이다.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은 정권에 따라서 범죄율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공화당 집권기에 자살과 살인을 합친 폭력치사율이 높아졌다고 발표한다. 공화당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부시가 재직한 1981년부터 1992년은 10만명당 19.9명에서 22.4명에 달하는 폭력치사율을 기록한다. 하지만 1993년 부시로부터 21.7명이라는 폭력치사율을 물려받은 빌 클린턴 집권기부터 변화가 생긴다.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취임하자 폭력치사율은 내림세를 보인다. 1997년 재선 첫해에는 18.3명을 기록했으며, 임기 마지막 해인 2000년에는 16.0명으로 하락한다. 이후 아들 조지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수치는 오름세로 돌아선다. 제임스 길리건은 저서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를 통해 이러한 수치의 변화가 우연이 아님을 밝혀낸다. 

이러한 현상을 건국 이후부터 인종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미국만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지역차별의 역사가 견고한 대한민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반세기가 넘도록 특정 지역을 정략적으로 소외시키는 한국판 분할정복전략이 20세기 후반까지 유효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차이점이라면 비열한 지역주의로 분열을 일으키려는 집권세력의 칼날에 맞섰던 흔적이 존재했다는 부분이다.  

길리건 박사는 반세기 동안 이어진 공화당의 분할정복전략의 희생양인 99%에 달하는 서민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국민의 삶과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갈림길에 정치라는 매개변수가 작용하고 있음을 적시한다. 한편 민주당 출신인 지미 카터 집권기에는 폭력치사율이 정체상태를 보인 기록이 있다. 그럼에도 길리건의 연구는 정치권력과 시민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저자는 1977년부터 1992년까지 매사추세츠주 교도소 수감자를 대상으로 폭력 예방 프로젝트를 실시한다. 이후 교도소 내 살인율·자살률을 획기적으로 떨어뜨리는 성과를 낸다. 2003년부터 2017년까지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자살률 1위를 기록한다. 2018년에 처음으로 2위로 내려갔으나 이는 한국보다 자살률이 높은 리투아니아가 OECD에 가입했기에 가능한 순위였다. 

조지 오웰은 소설을 통해서 사회를 설계하는 미래권력을 예견했다. 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살인과 자살을 설계하는 사회에서 밝고 건강한 일상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폭력과 죽음의 이면에 존재하는 설계자를 차단하는 사회란 유토피아에 불과한 것일까.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취향의 발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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