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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검사를 만나본 적은 없다. 이름을 적어놓았던 메모지도 지금은 없어졌다. 그런데도 검사 하면 그가 생각나는 이유는 전해들은 인상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10여년 전 우연히 탄 택시의 기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낮에 한 검사에게 점심을 샀다”고 말했다. 그는 의류 제조업체의 사장이었다고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공식 후원업체로까지 지정됐다고 하니 꽤 규모가 큰 회사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월드컵 때의 투자로 부도가 났다. 그는 전 재산을 털었지만 빚을 다 갚지 못했고, 고소를 당해 그 검사를 만나게 됐다.

검사는 조사가 끝나던 날 “300만원 있느냐”며 “그 돈만 갚으면 모든 문제가 끝난다”고 했다. 그에게는 300만원도 없었다. 검사는 “내가 빌려줄 테니 나중에 갚으라”며 300만원을 빌려줬다고 한다. 그는 검사에게 받은 300만원으로 채권자들과의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돈이 생길 때마다 10만원, 20만원씩 갚아나간 그는 내가 택시를 탄 그날 검사를 만나 빌린 돈을 마지막으로 갚았다. 그는 “돈이 없어 5000원짜리 국밥밖에 사지 못했다”고 했다. 얘기를 들려주는 택시 기사의 목소리에 묻어나던 고마움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내가 검사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많이 공부한 사람이라 역시 배려심도 깊구나.’ 이런 생각들을 했다. 세상의 검사들이 모두 그와 같다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밝아졌을까. 하지만 요즘 접하는 검사들은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27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바른미래당 채이배 의원이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관련 자료를 모니터에 게시한 채 박상기 법무부 장관에게 질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얼마 전 구속된 한 대기업의 검사 출신 부사장. 윤리경영부문장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가습기 살균제 원료 물질의 유해성을 알고도 이를 숨기려 자료를 폐기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사 시절에는 ‘맷값 폭행’ 관련 사건을 처리하면서 피해자를 기소했다. ‘장자연 리스트’ 관련 수사 때는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기소했다. 잡으라는 도둑은 안 잡고, ‘도둑이야’라고 외치는 시민들을 시끄럽다고 잡아들인 격 아닌가.

그리고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건설업자의 별장에서 성범죄를 저지르며 ‘육안으로도 (김 전 차관으로) 식별이 가능한’ 동영상을 찍었다. 한밤중에 해외로 나가려다 출국이 제지된 그는 잘못에 대해서는 아직 한마디 사과가 없다. 그저 “힘들다”는 말뿐이다.

무엇이 검사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수사권, 수사지휘권, 독점적 영장 청구권, 기소권을 독점한 그들의 막강한 권한 때문일까.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절대반지’는 그것을 가진 사람의 마음을 사악하고 탐욕스럽게 만든다. 착하고 순수한 프로도마저 반지를 보는 순간 눈빛이 변한다. 검사들에게 그들이 가진 절대적인 권한은 ‘절대반지’와 같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영화에서 반지를 용암 속에 던져 파괴하듯 검사들의 절대적인 권한을 줄여야 할 것이다.

얼마 전 ‘수포자(수학 포기자)’들이 처음으로 수학에서 어려움을 겪는 시기는 초등학교 3학년 ‘분수’를 배울 때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단순 연산에 그치던 초등학교 2학년 수학과는 달리 3학년이 되면서 분수와 도형을 접하게 되는데 이 시점에 수학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형성하는 학생들이 증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아이들이 ‘수포자’가 되는 시점에 충분한 학습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집중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검사들도 일을 하다가 윤리적인 측면에서 판단에 어려움을 겪는 시기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닐까. 예컨대 승진이라든가 보직이동을 처음 경험하게 될 때 같은. 만약 그렇다면 검사들에게도 어느 시점에 일을 떠나 윤리 교육을 다시 받게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부는 2009년 3월 ‘검사선서’를 만들어 새로 임용되는 검사들이 선서하게 했다. 

‘나는 이 순간 국가와 국민의 부름을 받고 영광스러운 대한민국 검사의 직에 나섭니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합니다.’

우리 사회가 원하는 검사의 모습이 만화영화에 나오는 ‘슈퍼 히어로’는 아닐 것이다. 검사로 취임할 때 선서한 바를 퇴직할 때까지 지켜주기만 해도 박수를 받을 것이다. 마음이 흔들릴 때면 ‘검사선서’를 다시 읽어볼 것을 검사들에게 권한다.

<김석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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