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반 칼럼

[정동칼럼]여성의 거래

opinionX 2019. 3. 29. 10:54

‘여성의 거래’(The Traffic in Women)라는 글이 있다. 제목을 들으면, 인류학자, 젠더이론가인 게일 루빈이 1975년에 쓴 페미니즘의 고전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을 거래 대상으로 삼는 현실에 대한 분석적 고찰은 루빈보다 훨씬 이전에, 루빈이 참조하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보다도 이전에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1940년 사망할 때까지 북미와 유럽에서 여성운동가이자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했던 옘마 골드만은 ‘여성의 거래’에서, 여성의 인신매매를 “백인 노예제”라고 부르던 당대 사회비평가들의 피상적인 도덕론에 반박하면서 사회적으로 열등한 여성의 지위, 현저히 열악한 여성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조건 등이 여성의 성을 착취하는 거래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골드만은 성매매를 백인들의 문제로 축소하는 당대 미국의 개혁운동이 인종을 막론하는 여성의 착취와 강제된 성매매의 역사를 간과하는 시각임을, 또 제도화된 여성 착취의 기저에 남녀의 성에 대한 고질적인 이중잣대가 있음을 지적한다. 

골드만의 글은 20세기 초 너무나 제한적이던 여성의 현실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성매매 산업을 고찰하는 글이므로, 역사적 조건도, 문화적 맥락도 다른 오늘의 우리 삶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여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되돌아보는 건, 골드만이 당시 지적했던 몇 가지 사실이 오늘 우리가 늘 마주하는 현실을 예견이라도 한 듯 느껴져서다. 즉 성폭력적 여성 착취가 사회 전체의 경제체제 및 문화와 밀착된 문제이고, 여성의 거래가 포주를 비롯한 알선자와, 섹스 또는 다른 형태로 뇌물을 수수하는 관련 당국자들의 공모 속에서 영속화되며, 이로써 한편으로 여성을 거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거래를 단죄하고 처벌하는 모순이 여성을 통제하는 거대 범죄구조로 자리 잡는다는 비판 말이다.

옘마 골드만이 ‘여성의 거래’를 쓴 것이 1910년이다. 이후 10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가 요구했던 여성의 “자신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려는 노력은 그동안 전 세계적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선 왜 여성의 거래가 사라지기는커녕 더 노골화되었을까. 피해자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성상납’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폭력적, 탈법적 작태는 골드만이 고찰했던 19세기적 성매매 산업보다 더 광폭하고 무도한  인신거래다. 장자연을 희생시킨 사건, 김학의사건, 그리고 버닝썬 게이트로 불거진 젊은 남자연예인 사업가들의 비위는 시기와 맥락은 다르지만, 특권의식과 이권의 결합으로 맺어진 남성연대 안에서 여성을 공여 가능한 재화로 삼는 노골적 거래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여성의 거래가그 본질상 거래되는 여성의 인권과 의지를 철저히 묵살해야만 가능한 성폭력일 수밖에 없음을 알려주는 이 사건들은, 성적 도구화된 여성을 매개로 하는 남성연대의 형성, 특권화된 쾌락의 독점적 소유자로서 남성의 폭력적 자기과시 등 여성을 거래한다는 행위가 개념적으로 연루하는 문제들을 가시적으로 총망라한다. 이 사건들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런 거래가 특권적 남성연대 안에서 공공연히 자행되는 동시에 조직적으로 은폐되어 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여성을 탈인간화하는 행위를 묵과하고 무마하는 공권력 대리인들의 공모는 상호적 이해관계로 맺어진 성폭력의 카르텔을 확장하고 공고히 한다. 이 특별한 교환행위, 또 그것을 통한 지위와 능력의 과시, 쾌락과 이윤의 획득은 그야말로 초법적 권력행사라는 차원에서 진정한 ‘특권’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뭔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면 이러한 사회에서 남성의 사회화는 여성의 탈인간화를 학습하고 반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 시대의 악습으로 치부하고 싶은 여성의 탈인간화가 젊은 ‘아이돌’ 남자들의 사업수완, 오락거리로 버젓이 활용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그 증거가 아닌가. 그런 사회에서 섹스는 테러나 다름없다. 카톡방의 무수한 성희롱 발언들에 상처받고 명예를 훼손당한 수많은 여성들, 불법촬영물로 인권을 유린당한 여성들, 연예 활동을 위해 성폭력 감수를 강요받는 여성들에게 섹스는 이미 테러다. 

그 위선적, 무법적 현실의 폭력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는 풀어야만 하는 어려운 숙제다. 수사와 처벌이 얼마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여성을 탈인간화하는 특권적 권력을 폭로하여 그 특권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은 거래의 ‘대상’이 될 것을 강요받고 침묵을 강요받았던 여성들이다. 내부의 성폭력적 문화에 침묵했고 과거에 덮었던 문제들을 ‘과거사’로 다시 떠맡은 검찰이 과연 공모의 그림자가 얼마나 높이 멀리 뻗었는지를 샅샅이 살필 수 있을지, 결국 테러가 테러를 눈감아 주는 형국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지켜보는 심정은 착잡할 뿐이다.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