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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라는 직업군을 특별한 영역으로 인식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는 인터넷이나 휴대폰이라는 매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필사즉생의 정신으로 한땀한땀 원고지 빈칸을 채워나가던 아날로그의 시대였다. 어떤 작가는 얼음 밥을 끼니 삼아 단절된 세상을 노래했고, 어떤 작가는 탈장의 고통 속에서 한국현대사를 32권 분량의 소설로 풀어냈다. 이들은 모두 전업작가라는 평생의 꿈을 이뤘다.

모름지기 작가라면 빛나는 문장을 잉태하려고 무박삼일 정도는 술독에 빠져 지내도 상관없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이러한 작가의 전설은 인터넷이라는 거인의 등장 이후 점차 사라졌다. 실시간으로 자신의 글재주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난 것이다. 신세대 작가들은 원고지와의 이별을 선언했다. 웹소설이나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서 자신의 필력을 뽐내는 필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디어의 발전으로 작가의 탄생 과정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세상은 더 이상 글만 잘 쓰는 작가를 원하지 않았다. 유명인이냐 아니냐가 작가의 가능성을 증명해주는 바로미터가 되었다. 유명인의 이름으로 등장한 책이라면 필력과 상관없이 일정 수준의 판매량이 보장되었다. 대형 스캔들의 주인공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출판계의 격한 환영을 받았다.

책 <작가란 무엇인가>에는 12명에 달하는 유명작가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펜으로 원고지의 빈칸을 채우던 20세기형 작가라는 점이다. 천문학적 인세를 챙기는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신인 시절에는 원고지를 사용하던 작가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은 보다 실제적이고, 동시대적이고, 포스트모던한 경험을 글감으로 다룬다고. 역사관에 관한 영양결핍에 시달리는 작가치고는 꽤나 진중해 보이는 발언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인터뷰도 인상적이다. 그는 매우 견고하게 쓰인 글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아무 상관없지만, 연약하게 쓰인 글은 만일 그것에 대해 말해버리면 그 구조가 깨져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고 주장한다. 기자 출신다운 강단이 드러나는 발언이다. 만약 홍대주점에서 헤밍웨이랑 하루키가 2차 세계대전의 해악에 대해서 논쟁을 벌인다면 그야말로 볼만하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소개한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남미문학의 대가다운 마르케스의 목소리 또한 경청할 만하다. 그는 자신의 유명세가 커지면서 더 많은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는 사실이 문학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책임감을 준다고 토로한다. 저널리스트로 활약했던 경험이 자신을 항상 현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도와주었다고 털어놓는다.

인터뷰에 등장하는 하루키, 헤밍웨이, 마르케스의 공통점은 오로지 문장으로 진검승부를 했던 원고지 세대라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시대의식을 가지고 있거나, 시대의식에 대해서 침묵을 유지하는 차이점을 드러낸다. 일본 문학 자체를 멀리했던 하루키는 자신이 전공투 시대의 방관자였다고 고백한다. 헤밍웨이는 소위 정치적인 작가란 자주 자신의 정치관을 바꾸기에 이런 글은 무시해도 상관없다고 단언한다.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바로 마르케스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문학과 저널리즘이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결국 세상의 모든 저널리즘은 문학적 표현이나 감성을 내재하지 않고는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반증이다. 건조한 형식의 저널리즘이 주류인 한국언론계에서도 생각할 여지를 주는 대목이다. 뉴욕타임스나 보스턴 글로브는 문학적 표현을 골격으로 한 저널리즘을 중시하는 대표적인 매체다. 문학적 감수성이 스며들어간 칼럼은 독자에게 인생을 성찰할 수 있는 사유의 결정체로서의 역할을 가능케 한다.

작가란 무엇인가. 그는 현실과 역사와 가치관의 끊임없는 불협화음을 마다하지 않는 존재이며, 권력 앞에서 자신의 필체를 바꾸지 않는 지식인이다. 작가란 무엇인가. 그는 지식의 굴레에서 탈피하여 의식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혜안을 가진 현자이다. 마지막으로 작가란 무엇일까. 그는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와 미래를 통찰하는 언어의 인간이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음란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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