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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말했다. 도대체 밥이 나오냐고 쌀이 나오냐고.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처음에는 밥이나 쌀이 나오리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때는 1980년대 후반. 군부 출신이 줄줄이 대통령직을 독식하는 과정에서 젊은 세대는 조금씩 그들을 닮아갔다. 말투도, 복장도, 가부장적 권위주의도 예외일 수 없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지 않았던가. 전체주의 정권은 개인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각각의 개성을 말살한다고. 당시 개인만의 취향이란 억압의 대상이기 십상이었다.

취향을 거부하는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수집행위에 몰두했다. 음반(LP)을 모으기 시작한 거다. 그것도 미친 듯이. 자장면 값은 아깝지만 음반을 사는 데 나가는 돈은 아깝지 않았다. 술약속이 생기면 집에서 미리 밥을 먹고 나갔다. 안주값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 돈만큼 음반을 샀다. 동문회를 포함한 각종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3대 기타리스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만한 이가 없기도 했거니와 권력자 흉내를 내보려는 취객들의 잔소리가 지겨웠기 때문이다.

토요일이면 광화문으로, 명동으로, 명륜동으로 달려갔다. 새로 들어온 음반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손바닥이 뿌옇게 될 때까지 음반을 뒤지던 순간을 사랑했다. 누구처럼 해봐서 안다. 한 장의 명반을 구하려고 중고음반점을 전전하던 고행의 시간을. 우연히 구입한 LP에서 절정의 소리가 쏟아져 나오는 환희의 순간을. 장대비가 45도 각도로 내리던 날, 턴테이블에 누운 재즈 베이시스트 론 카터의 LP에서 들려오는 정중동의 전율을.

세월이 흐른다. 음반수집가들은 아날로그를 버리고 디지털을 선택했다. 구수한 인간미가 넘치는 LP를 포기하고 CD를 대세로 받아들였다. 20여분마다 판을 뒤집어야 한다는, 보관이 용이하지 않다는,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핑계로 LP 수집을 포기한 거다. 하지만 CD의 전성시대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번에는 파일과 인터넷으로 음악을 듣더라. 유튜브에는 군침만 흘리던 전설의 음반들이 속속 등장했다.

나는 음악을 실물 형태로 간직하던 세대였다. 1980년대 당시는 LP가 라디오와 함께 음악의 소통수단이었다. 당연한 일상은 인간의 사유능력을 마비시킨다. 일상이 사라진 뒤에야 가치를 깨닫고 바보처럼 과거를 아쉬워한다. 후회했다. 왜 LP가 하나의 예술품이었다는 소중한 사실을 몰랐을까. 왜 한옥의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을까. 왜 아날로그가 뿜어내는 아로마 향기를 외면했을까. 왜 밥도 쌀도 아닌 존재를 마지막까지 지켜내지 못했을까.

4차 산업혁명의 열기가 뜨겁다. 온갖 매체에서 미래의 먹거리를 찾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로 인해 10년 후에는 직업의 절반가량이 사라진다는 소문이 가득하다. 음악도 마찬가지일까. 포더링게이의 LP를 구하려고 서울시내를 정신없이 떠돌던 20대의 추억은 한 편의 무성영화였을까. 그렇지 않다. 과거는 무조건 땅속에 묻어야 하는 구태의 결정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취향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이다. 황병기도, 조성진도, 나윤선도 타인의 취향 속에서 존재해야 하는 음악가이다. 문화예술의 다양성이 존재하는 사회는 아름답다. 상상해보라. 국악, 클래식, 재즈, 록음악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연장의 열기를. 한국에도 엘 시스테마에 버금가는 창작 환경이 만들어지는 미래를. 단, 여기에 전제가 따른다. 거대 소비자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타인과 나의 취향이 고루 존재하는 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음악을 과하게 좋아하다 보니, 관련한 이런저런 일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아버지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지만 시와 아름다움, 낭만, 사랑은 삶의 중요한 목적이라고.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지만 우리 곁에는 취향이 존재한다. 처음에는 비록 밥도 쌀도 아니겠지만.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음악을 읽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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