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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백악관 사무실이 등장한다. 노회한 공화당 정치인이 묘한 미소를 짓는다. 그는 세상을 삼킬 듯한 기세로 상대방을 응시한다. 정치인은 자신의 보좌관에게 3가지 사항을 지시한다. “입을 다물 것, 시키는 대로 할 것, 충직할 것.” 영화 <바이스>에 나오는 장면이다. 정치인의 이름은 도널드 럼즈펠드, 그의 신임 보좌관은 딕 체니. 시대적 배경은 닉슨 대통령의 집권기다. 

이후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 직전에 사임을 선택한다. 정치생명이 막을 내린 닉슨과 달리 딕 체니는 포드 대통령 비서실장, 와이오밍주 하원의원, 공화당 원내총무, 국방부 장관, 미국 석유시추회사 대표이사라는 직책을 차례로 맡는다. 

부와 권력을 모두 움켜쥔 야심가. 정치인 부부모임에 참석한 아내가 그에게 귓속말을 한다. “절반은 우리를 좋게 보고, 절반은 우리를 경계해”라고.  

미국 공화당 현대정치사를 시간순으로 보여주는 가운데 조지 W 부시가 등장한다. 대선후보로 나오려는 그는 딕 체니에게 부통령직을 거듭 제안한다. 조지 W 부시는 디테일에 약한 자신의 구멍을 채워줄 2인자가 필요했다. 딕 체니를 향한 아내의 충고가 이어진다. 그녀는 정치계로 재입성하려는 남편에게 부통령이란 대통령이 죽는 날만 기다리는 자리라고 폄하한다. 순간 딕 체니는 2인자의 딜레마에 빠진다. 

예스맨의 기질을 방패 삼아 정치계에 입문한 딕 체니. 그는 발톱을 숨기고 권력의 갈림길에서 2인자의 태도를 고수한다. 침묵, 순종, 충성이라는 가부장적 정치관을 밑천 삼아 딕 체니는 내로라하는 권력자의 틈바구니에서 용케 살아남는다. 고민 끝에 그는 조지 W 부시에게 흥미로운 역제안을 내놓는다. 곰과 여우의 중간지점을 오가던 거물 정치인의 선택은 대통령 권한의 나눠먹기였다. 

영화 <바이스>에서 배우 크리스찬 베일(왼쪽 소파에 앉은 사람)은 딕 체니를 완벽하게 연기한다. 콘텐츠판다 제공

부통령직을 승낙하되 군사통치권을 자신에게 넘길 법적 근거를 달라는 요구가 2인자의 승부수였다. 대통령직 외에는 다른 계산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조지 W 부시는 정치8단의 제안을 흔쾌하게 받아들인다. 러닝메이트의 제안에는 자신이 대표직을 맡았던 핼리버튼이라는 기업과의 유착이 깔려 있었다. 2인자의 욕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매파로 알려진 정치 선배 럼즈펠드를 진영에 끌어들인다. 

딕 체니는 2인자보다 낮은 위치에 있던 부통령의 권력을 극대화하는 데 성공한다. 군사권을 움켜쥔 부통령에게 9·11사태는 전쟁을 벌일 절호의 기회였다. 게다가 그의 곁에는 럼즈펠드를 비롯한 매파가 포진하고 있었다. 테러와의 전쟁을 부르짖는 아들 부시는 부통령의 대변인에 지나지 않았다. 민주당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까지 합세한 이라크전은 60여만명에 달하는 이라크인의 생명을 앗아간다. 

전쟁 이후 세계 최대의 석유기업 핼리버튼의 주식은 500%를 상회하고, 현직 부통령이 벌어들인 스톡옵션은 무려 113억원에 이른다. 영악스러운 2인자의 최종 목표는 부의 축적이었다. 그의 질긴 정치수명은 여기까지였다.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이라크전의 설계자가 바로 딕 체니와 측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공화당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민주당 출신의 오바마가 당선된다. 

2인자의 조건은 무엇일까. 1인자의 자리를 넘보지 말아야 하며, 1인자의 약점을 최소화해주는 동시에 강점을 극대화할 것. 2인자의 공을 감추고 1인자에게 공을 넘겨줄 것. 나열한 교과서적인 조건에는 변수가 도사린다. 영원한 1인자가 없듯이 영원한 2인자 또한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아닌 권력에 충성하는 2인자는 1인자의 수하에서 호시탐탐 자신만의 권력을 펼칠 기회를 노린다.  

권력 앞에서는 여우의 가면을, 국민 앞에서는 곰의 가면을 택했던 정치인 딕 체니. 그는 2인자의 자리를 이용해 1인자의 권력을 향유했던 인물이다. 딕 체니는 무려 8년간 부통령의 자리를 사수한다. 미국만의 안보를 미끼로 안락한 권력을 누렸던 2인자의 배후에는 꼭두각시 대통령이라는 그늘막이 존재했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취향의 발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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